[문화칼럼/장석만]나는 요즘 占집에 간다

  • 입력 2005년 5월 9일 18시 24분


얼마 전 TV에서 새점(鳥占)을 치는 모습이 나오는 광고를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점치는 집을 둘러본다. 그 여인은 자신이 결코 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 집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광고는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개척하는 독립적 태도와 점에 의지하는 나약한 태도를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점을 운명론적이며 비과학적이라 비난하는 사람은 점을 다 모르는 사람이다. 점을 본다고 해서 무작정 점에만 의존한다고 보면 안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다음에 점쟁이를 찾는 사람도 많다. 점은 결국 인생의 ‘빈 틈’과 관계가 있다. 아무래도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은 있게 마련이고, 여기에 과학적 합리성을 무조건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점과 과학을 갈등 관계로 보는 것은 두 영역이 서로 다른 차원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점을 본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부닥치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방향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점의 이런 성격을 도외시하면 왜 많은 사람들이 점에 이끌리는지 설명할 수 없다. 점을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가 심해질수록 오히려 점은 더 유행하곤 한다.

나는 요즘 종종 점집에 간다. 점쟁이가 들려주는 내 인생의 점괘에 관심이 있을 뿐 아니라 점쟁이의 점치는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이른바 용한 점쟁이는 순식간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의 관심은 용한 점쟁이가 어떻게 ‘매혹의 기술’을 활용하는가이다. 신 내림을 받은 지 석 달도 안 지났다는 애기무당과 30년 넘게 점을 쳐 온 할머니 점쟁이의 점치는 모습을 보면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애기무당은 부채와 방울을 양손에 들고 손님인 나를 초월의 영역에 연결해 주려고 애썼다. 초월의 영역에서 받은 메시지가 자신의 몸을 거쳐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시퍼렇게 날이 선 신 내림의 체험 속에 사로잡혀 있는 탓인지, 이모저모 나를 살피는 눈은 서툴렀다. ‘몸주’의 말을 전하는 데 치중하느라 손님의 태도와 무의식적 반응을 읽어 해독하는 일에는 소홀해 보였다.

반면에 일흔이 넘은 할머니 점쟁이는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나타내는 여러 반응을 놓치지 않고 거두어들였다. 내 목소리와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미묘한 표정의 변화까지 포착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에 대한 ‘밑그림’을 탄력적으로 수정했다. 나는 사소한 것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뽑아내는 할머니 점쟁이의 날카로움과 한순간에 이 정보를 종합하는 직관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점쟁이는 나와의 의식적, 무의식적 의사소통을 이루어 내고 내 인생의 윤곽을 보여 줬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실에 꿰어 제시되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 점쟁이가 스케치한 내 인생의 그림을 통해 잠깐이나마 그동안의 삶을 다른 각도와 단위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점치는 때만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며 ‘전체적’으로 생각하는 순간은 드물다. 점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점을 보는 경험은 잠시 일상의 습관에서 벗어나 생각과 느낌의 단위를 바꾸게 한다.

점을 보면서 그동안 한 묶음으로 있던 일상의 삶에 조그만 틈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틈을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거리를 얻는다. 우리에게는 삶의 전체적 조망을 얻기 위해서라도 간혹 이런 여유가 필요하다.

장석만 옥랑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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