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사람,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선(善)이다. 바로 이 선의 뿌리에서 사회정의의 감각, 인간적인 연대의식, 각종 사회보장과 사회정책, 나아가 여러 모습의 사회주의도 탄생했다. 그러나 약자를 생각하는 것이 선이요 정의의 출발이라 해서 그렇기에 약자가 곧 선이요 약자가 곧 정의라 할 수 있을까. 어린이는, 노인은, 여자는 언제나 선이요, 정의인가. 내 아이는 어린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착하고 예쁘기만 한 것일까.
집안을 마구 더럽히고 어지럽히고 뒤집어놓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떼쓰고 졸라대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어느 젊은 엄마가 “우리 아이는 잠잘 때만 예쁘다”고 한 말을 나는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어린이는 예쁘지 않고 귀하지 않아도 떠들고 싸우고 떼도 쓰면서 자라나 성인이 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약자를 생각하는 것이 선이요 정의의 출발이라 해서 ‘사회적 약자’가 곧 선이요 정의라 할 수 있을까. 없는 사람은, 노동자는 언제나 선이요 정의인 것일까.
어린이를 천사처럼 미화하는 것이 ‘동화’라면 노동운동이 선과 정의를 독점한 것으로 미화하는 것은 ‘신화’다. 마치 옛 군왕의 왕권신수설이 신화였던 것처럼…. 일방적인 자본가의 성악설(性惡說)이나 일방적인 노동자의 성선설(性善說)은 둘 다 현실을 이탈한 허구일 뿐이다.
요즈음 각급 노동조합 간부들의 부패 비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아니 노조마저도…” 하는 충격 속에 배신감과 허탈감마저 느끼고 있다. “아니 그럴 수가…” 하면서.
물론 그럴 수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성선설을 믿는 것이 현실과는 무관한 신화라면 실제는 노동자나 자본가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그를 위해 비리도 배신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선 서로 다를 게 없다. 게다가 조합을 꾸민 노동자는 이미 단순한 ‘약자’가 아니다. 조직을 가진, 그래서 권력을 가진 노동조합은 그 힘으로 약자인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또 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노조는 조직된 힘으로 권력과 결탁하여 궂은일을 할 수도 있고 또 했다.
파쇼의 괴수 무솔리니조차 굴복시키지 못했던 밀라노의 권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가 끝내 자유주의 노선을 포기한 것은 이 신문 노조의 압력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제3세계 최고의 권위지로 꼽힌 아르헨티나의 ‘라 프렌사’지가 결국 페론의 독재 체제 하에서 자진 정간하고 만 것은 페로니스트와 결탁한 사내 노조의 압력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노동 운동과 노조 활동은 세력이 엄청나게 커졌지만 아직 역사는 짧다. 이번 노조 간부의 각종 비리 스캔들도 보기에 따라서는 노동 운동의 성장과정이 겪는 진통으로 못 봐줄 것도 없다. 가져보지 못한 권력을 갑작스레 가져보게 됐으니….
이번 사건이 그런 대로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면 그건 약자가 곧 선이요 정의라는 한국사회의 신화를 깨부수어 주었다는 점이다. 아이는 언제까지나 아이일 수 없고 어른이 되듯이 사회적 약자도 언제까지나 순수 무구의 약자로만 있는 건 아니다.
그렇대서 노조운동을 잠재우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은 “아이는 잠잘 때만 예쁘다”고 생각하는 철없는 엄마의 이기주의와 다를 바 없다.
최정호 객원대기자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