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무개 씨는 북한 출신의 일흔 노파다. 수십 년 전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가 곡절 끝에 중국에 머물게 됐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딸마저 죽자 살길을 찾아 여권을 위조해 서울에 왔다. 지금은 무료 법률상담소를 찾아다니며 탈북자 대우를 받을 수 있는지 허망한 희망만 확인하고 다닌다.
사업가 강 씨가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한국 국적을 완전히 포기해 버린 행위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면초가의 이 씨가 구걸하듯 한국 주민등록증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누가 염치없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국적을 둘러싼 인간의 광경은 다양하다. 그뿐만 아니라 국적에 관련된 정치적 판단은 복잡하다. 이중국적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도덕적으로 다룰 것이냐 법적으로 처리할 것이냐와 같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택권 미리 뺏는건 인권침해
그러나 최근 벌어진 국적 포기 사태는 비교적 단순 명료하다. 개정 국적법의 발효를 앞두고, 수많은 사람이 자녀의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그 동기는 일차적으로 군 입대를 회피하려는 것이고, 부차적으로는 경제적으로 편안한 삶의 기회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일순간 여론이 들끓었다. 국가라는 소속 공동체의 의무를 앞세운 도덕적 공격과 세계화 시대 행복 지향의 미래를 내세운 현실적 방어가 맞섰다.
하지만 그 논쟁에는 핵심이 빠져 있었다.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군복무를 일상생활의 영역 가까이로 끌어들이거나, 일반적인 대체 복무 제도를 마련하는 선결 문제도 그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적 포기의 결정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다.
무더기 국적 포기 사태의 주인공이 누구였던가 생각해 보자. 겨우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어린이들인가, 아니면 그 부모들인가. 국적 포기라는 법률 행위를 한 행위자는 어른들이다. 그 법적 효과가 귀속되는 주체는 아직 의사 결정 능력이 완전하지 못한 아이들이다. 훗날 아이가 커서 스스로 결정할 기회가 있는데도 국적을 마음대로 정해 버려도 좋은 것일까. 병역 의무를 면하는 것이 국적보다 더 큰 가치일까. 하기야 그런 사람들은 한국의 고통스러운 병역 복무를 피하면서 선망의 미국 국적까지 얻는 것이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이중의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권리가 있다. 어른들은 아동권을 위해 헌장을 만들고 국제조약을 체결하며 국내법을 제정한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 위한 존재이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보통의 발상이다. 그래서 일정한 교육을 받게 하고, 위험에 처했을 때 먼저 구하도록 보호하고, 너무 힘든 일을 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권리는 모두 어른들의 수준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속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른의 삶을 되풀이하기 위해 대기 중인 작은 어른이 아니다. 그들에겐 우리와 전혀 다른 미래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아이가 성장하여 결정할 수 있는 국적 선택의 권리를 부모가 미리 행사해 버리는 소동은 아이에 대한 인권 침해이자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런 면에서는 소란을 일으킨 새 국적법 자체도 마찬가지다.
아이 자란뒤 결정할 기회줘야
이번 기회에 모두 아이들의 정신세계와 권리의 이해를 위한 진지한 반성을 하자고 제안한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 첫머리와 함께.
“망가진 인형 때문에 흘리는 눈물과 좀 더 자라서 친구를 잃고 흘리는 눈물에는 차이가 없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슬퍼하는가이다. 하늘에 맹세컨대,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결코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적지도 않거니와, 때로는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훨씬 무겁다.”
차병직 변호사·참여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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