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태균/사림파의 개혁성과 보수성

  • 입력 2005년 6월 4일 03시 02분


학생들에게 ‘역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어보면 십중팔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대답한다. 질문은 역사의 개념인데, 학생들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에드워드 H 카의 정의를 인용하는 것이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 중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답해주면 학생들은 단순한 답에 오히려 허탈해한다.

학생들의 답이 문제에 대한 동문서답이건만,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재차 질문을 하면, 그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답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암기식 교육이 만들어내는 폐해는 역사 시간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이제 고전이 되었고, 많은 비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그의 정의는 지금도 중요한 명제로서 작동하고 있다. 즉, 역사를 바라볼 때 현재의 문제의식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관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역사 속에서 현재 문제의 기원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최근 대통령자문 정책위원회를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일부의 문제를 갖고 전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와중에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논쟁을 정리하고자 하는 시도가 제기되어 또 다른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 여당 내의 한 분은 ‘사림(士林)’ 때문에 조선시대가 망했다고, 다른 한 분은 ‘훈구(勳舊)’파와 비교하면서 ‘사림’의 개혁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림’의 인용에 대하여 도하 언론들은 정부 여당 내에서 서로 대립되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현실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사림’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평가는 결코 비역사적이거나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같은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시기에 따라서 그 역할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훈구’에 도전했던 조선 전기의 ‘사림’과 ‘실학파’의 도전을 받았던 조선 후기의 ‘사림’은 분명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세력들이었건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서로 다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기의 ‘사림’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가 상호 대립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조선시대 ‘사림’의 역할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조선 전기 ‘사림’의 개혁성과 조선 후기 ‘사림’의 보수성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 것은 이미 조선시대가 기울어지고 있었던 구한말부터 나타났다. 지금 우리는 21세기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오래된 논의를 지금 다시 끄집어내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 ‘사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나는 ‘사화(士禍)’를 통한 교훈이다. 사회적인 동의나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조급하게 이루어지는 개혁이 얼마나 큰 시련에 부닥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자칫 모든 개혁의 성과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는 중요한 위기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둘째로 ‘진보’가 영원히 ‘진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진보’ 세력들이 정치권력에 다가선 것이 벌써 10여 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진보’를 지키려고 노력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진보 세력 내부에서 학연과 지연을 중시했던 기득권 세력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사림’은 세월이 지나면서 ‘훈구’의 과오를 답습했고, 결국에는 세도정치를 만들어냈고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오늘 민주화 시대의 ‘진보’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개혁과 혁명을 추진했던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보수’가 되어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면 제대로 찾아야 한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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