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의 헌법 부결은 예견된 결과였다. 헌법이 통과될 경우 동유럽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몰려와 취업난이 가중될 것이라는 불안에 근로자들은 동요했다. 자국 공장의 동유럽 이전으로 실업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도 못마땅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은 유럽헌법의 취지와 내용이 이런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답답함을 호소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유권자들에게 “제발 헷갈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보수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집권여당 총재는 “헌법은 오히려 터키의 EU 가입을 힘들게 할 수 있는 장치”라고까지 설득했다.
하지만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헌법은 부속문을 빼고도 191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대로 헌법안을 파악하고 투표에 임한 유권자가 몇 명이나 될까. 고작해야 유럽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무장관직이 신설된다는 것만 알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들로선 “동유럽의 싼 노동자가 밀려온다”는 극우파의 선동과 “주 35시간 근로제를 뒤엎은 자유시장 경제를 반대한다”는 극좌파의 주장에 더욱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일부 정상은 그동안 자국 내의 문제 해결보다는 유럽 통합에 매달려 왔다. 미국에 맞서는 강한 유럽을 건설한다는 이상(理想)에 스스로를 가둬 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실업률과 물가 급등, 가처분 소득 저하 등 국민들의 고통은 커져만 갔다.
당장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이상을 호소하는 지도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유럽헌법의 찬반을 묻는 투표가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 투표로 변질될 수밖에. 한마디로 이상정치와 현실정치의 괴리가 생긴 것이다.
헌법이 부결되자 지도자들은 뒤늦게 현실에 눈을 돌렸다. 시라크 대통령은 내각을 개편한 뒤 “실업률 해소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얀 페테르 발케넨데 네덜란드 총리는 “유럽의 이상은 정치인들에게는 살아있지만 국민에게는 그렇지 않다”면서 “정치인들이 이제 변해야 한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프랑스는 이번 헌법 부결 사태를 겪으면서 국론이 극심하게 분열됐다. 우선은 지지층이 두꺼운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상처를 입은 반면 극좌와 극우파가 승리한 모양새가 됐다. 여당은 물론 야당인 사회당에서도 찬반 여론이 엇갈려 지도부 사퇴 등 후유증을 겪고 있다.
통합이 아니라 분열과 반목, 증오와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양상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시라크 대통령에게 있다.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을 어느 정도의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해소시켜 주느냐에 따라 그의 정치적 운명도 판가름 날 전망이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남은 임기 2년간의 레임덕뿐이다.
금동근 파리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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