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님 웨일스를 찾아서

  • 입력 2005년 6월 9일 03시 05분


리영희 선생의 회고록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읽으면서 님 웨일스(Nym Wales)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쓴 ‘아리랑(Song of Ariran)’ 한국어 번역판을 읽은 지 20년 만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미국이 조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회고하면서 리영희 선생은 님 웨일스라는 이름을 끄집어냈다.

이런 얘기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이 반격을 준비하던 어느 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코리아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니 책을 가져오라”고 한다. 참모들은 겨우 두 권의 책을 찾아냈다. 한 권은 님 웨일스가 그해 영문으로 펴낸 ‘Song of Ariran’이었고, 다른 한 권은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의 책이었다는 것이다.

잠시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의 흥분과 감동이 되살아난 탓이기도 하겠지만, 직업병 때문이기도 했다. ‘습관적으로’ 과거를 현재에 대입해 보고 싶어 하는 신문기자의 직업병….

독도 문제로 우리와 일본이 일촉즉발의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던 3월, 청와대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을 붙들고 한일관계사를 ‘강의’해야 했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는 ‘미국의 무지’가 현재진행형이지 않았을까. 노 대통령이야말로 누구보다 미국의 무지에 분노하고 갑갑해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누굴 탓하겠는가. 미국에 대한 노 대통령의 무지도 만만치 않다는데….

빈정거릴 생각은 없다. 사실은 조그만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60여 년 전 백악관 참모들이 찾아왔다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다.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에드거 스노의 부인이기도 했던 저자 님 웨일스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역사 속의 한 인물을 찾아내 기록으로 남겨줬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님 웨일스는 조선의 슬픈 역사와 강인한 지성으로 그 역사를 헤쳐 나간 어느 코리안의 얘기를 세계에 남겼다.

리영희 선생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와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 고은(高銀) 시인 등이 1995년 님 웨일스에게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주자고 청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녀의 ‘조선 사랑’, 그리고 조선 민족의 착함과 일제강점기의 고난을 전 세계에 알린 그 공을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김영삼 문민정부’는 그 청원을 기각했다. 공산주의자를 다룬 책이라는 이유로. 10년 전 우리는 그렇게 무지하고 협량(狹量)했다. ‘아리랑’은 지금 일본 이와나미(巖波) 서점이 선정한 ‘세계의 고전’이 됐고, 그 사이 님 웨일스는 타계했다.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님 웨일스의 유족을 찾아 그녀의 ‘조선 사랑’을 기리자. 거기서 멈춰서도 안 된다. 제2, 제3, 제4의 님 웨일스를 발굴하자. 그리고 그들이 세계 곳곳에서 아리랑을 노래하게 하자. 남의 무지만 탓하지 말고.

김창혁 국제부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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