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상식화되고 자연화된 통념, 하지만 이제 그 역사적 타당성을 잃어버린 통념을 어떻게 부술 것인가? 숱한 세월 속에서 그 무게를 더해온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지워버릴 것인가? 데카르트 철학의 일차적 의미는 이런 전환기의 물음에 부응하여 모범적인 해체론의 사례를 남겼다는 데 있다. 이 해체론은 어떤 길, 여정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어떠한 해체론과도 쉽게 구별된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나 ‘우화’의 형식에 실려 표현되는 개인적인 ‘나’의 여정이고, ‘아낙네’도 읽을 수 있는 평이한 문체의 일상어로 그려지는 내면적 발견의 여정이다. 이 여정 속에서 저자는 자신을 ‘어둠 속을 홀로 걷는’ 단독자로 의식하고 있으며, 정신적 홀로서기에 이르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역사적 과거를 파괴하고 있다. 자신의 개인사를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멀리 이어가면서 중세의 기억에서 해방되는 원심력을 얻고, 마침내 근대성을 잉태하는 탈주의 궤적을 그려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여정은 6단계로 이어진다. 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의 학문적 성장과정 속에서 체화된 과거의 학문을 비판하고 선별한다. 여기서는 과거의 주류 사상에 대한 환멸과 수학에 대한 감동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2부는 모든 학문과 진리탐구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데, 여기서는 근대 과학의 창시자로서 저자가 지녔던 자부심이 드러나고 있다. 3부는 도덕인데, 이는 과학의 마지막 발전단계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천학이 아니라 그런 국면을 기다리는 동안 좇아야 하는 ‘임시 도덕’이다.
4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학문체계의 첫 번째 진리로 선언하는 간략한 형이상학적 성찰이다. 이 성찰도 진리를 열망하던 정신이 회의주의자로 탈바꿈되고, 회의주의자였던 정신이 다시 진리의 존재론적 기원인 신과 세계를 재발견하는 개인적 회상의 길을 따른다. 5부는 저자가 자신의 방법을 통해 성취한 여러 과학적 발견의 대강을 서술한다. 끝으로 6부는 새로운 과학이 가속화할 역사적 진보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이런 진보에 필수 불가결한 실험과 관찰에 지식인들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방법서설’의 첫 문장은 ‘이 세상에서 양식(良識)보다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은 없다’이다. 데카르트는 이 문장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여정을 열면서 동시에 철학적 의미의 근대를 열어 제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의되는 것처럼, 근대성은 이성의 자율적 사용 속에서 싹트고 열매 맺는다.
이 작품은 이성의 자율적 사용에 요구되는 조건과 방법에 대해, 또 그런 자율적 이성 사용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해 처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사상사의 고전이다. 나아가 이 작품은 모국어의 시대를 앞당겼을 뿐 아니라 일인칭 관점의 서사가 발휘하는 파괴력을 통해 철학사 해체론을 실천한 보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로 남을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