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해 서울 중심부를 관통하여 중랑천과 합수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청계천이야말로 조선 개국 이후 500년 역사를 지켜본 하천이다. 조선시대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엔 문반(文班)이, 남촌엔 무반(武班)이 모여 살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충무로 일대를 개발했으나 청계천변은 북촌과 남촌의 완충지대로 서울 보통시민이 고단한 삶을 꾸려온 생존의 현장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박태원(1909∼86)이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천변풍경’을 읽지 못하다가 해금 후 읽게 되었다. 청계천변을 중심으로 1930년대 서울 중산층과 하층민 삶의 애환을 다룬 이 소설은 우리 현대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요, 세태소설의 진수다. 소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정이월에 대독이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이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는 시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광복과 이어 닥친 전쟁의 북새통 속에 서울로 모여든 난민들이 천변에 누더기 같은 판잣집과 움막을 짓고 살면서 하천은 그만 하수로 오염되고 말았다. 6·25를 서울에서 겪은 필자는 그해 여름 엄마를 따라 식용품을 구하러 오간수다리 부근 난전(亂廛)에 나갔다가 시체 몇 구가 쓰레기더미 하천바닥에 버려진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복개공사로 물줄기는 자취를 감췄고 압축성장 시대를 맞자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는 어린 미싱사들의 재봉틀 소리가 자정까지 그치지 않았다. 1970년 노동운동의 효시가 된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도 청계천이 남긴 아픈 기억이다.
지속적인 조림공사를 통해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사례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외신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썩은 건천(乾川)을 친생태환경 하천으로 복원하겠다는 청계천 복원공사야말로 서울 이미지를 바꾸게 될 뿐만 아니라 친환경 도시공학 측면에서도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국심(國心) 광화문의 동아일보사 앞에서 시작되는 청계천 복원공사는 10월 말 완공을 앞두고 현장 일손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천바닥에 자연석을 깔고, 층층으로 쌓은 물가 돌 틈에 꽃나무를 심고, 물과 숲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만들고, 아름다운 밤 풍경을 연출할 조명등 설치에 여념이 없었다. 5.8km의 청계천을 가로지를 21개의 다리가 제 모습을 드러낼 때, 청계천은 뚝섬 서울숲과 연결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파리를 몇 차례 방문했을 때 센 강변을 거닐며 서울은 언제쯤 도심에 이런 맑은 강을 끼고 살며 한가롭게 산책해볼까를 소망했고, 청계천 복원공사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한 지가 어제 같은데, 올 10월 이후 센 강보다 더 아름다운 청계천을 보게 될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왕 일을 벌인 김에 우리 문학의 고전이 된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기념할 모형물도 세우고, 1960년대에 밉상으로 들어선 종로 세운상가에서부터 퇴계로 신성·진양상가까지를 헐어내 종묘시민공원에서 남산에 이르는 도심 가로공원을 만들면 어떨까 싶다.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흘러 서울시민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줄 만추 그때쯤, 이 나라 위정자들도 국민의 분열과 갈등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봉합해서 화합의 물줄기가 힘차게 흐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원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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