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 칼럼]삼팔선, 400년의 자화상

  • 입력 2005년 6월 2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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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6월이다. 비명 절규 신음 통곡 흐느낌, 그리고 애도 탄식이 물결치는 회한의 계절이다. ‘삼팔선의 저주’는 언제나 끝날 것인가. 반세기 전의 6·25전쟁도, 5년 전의 6·15남북정상회담도, 모두 삼팔선을 에워싼 6월의 역사다.

북위 38도선은 1945년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었다. 일본이 1896년 6월 그었던 분할선이다. 정확히 109년 전이다. 일본 외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에게 ‘조선 분할지배’ 방안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다행히(?) 배부른 러시아는 이것을 뿌리쳤다.

일본의 한반도 ‘칼질’ 공작은 기실 그보다 3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와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명(明)나라에 강화(講和)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남부 4도(道) 할양이다. 조선 8도 가운데 남부 4도란 바로 38도선 이남이다.

가증스러운 왜(倭)의 통탄할 공작! 그렇게 분노하면 그만일 것인가?

원한과 분노를 삭이고,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대륙세와 해양세의 역학이 소용돌이치는 한반도, 그 접점이 38도선임을 인정해야 한다.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보면 반도 주변의 운동에너지가 빅뱅을 일으킬 때 38도 언저리에서 불꽃이 튀는 구조인 것이다.

1903년에는 러시아가 거꾸로 일본을 향해 39도 분할을 제의한다.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로젠이 일본에 ‘평양과 원산을 잇는 이북을 러시아 세력권에 넘기라’는 취지의 제안을 했다. 이때는 요행히(?) 일본이 이를 뿌리치고 그 이듬해 러-일전쟁에 돌입한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합방으로 삼킨다. 그 일본제국은 미국을 공격하는 착란(錯亂)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일제가 1945년 원자폭탄과 ‘소련 참전’으로 항복함으로써 두 번이나 협상 테이블에서 죽은 ‘삼팔선 유령’이 다시 살아난다. 미국이 공산 소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38도 분할카드를 내밀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함으로써 한반도는 갈라지는 것이다.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삼팔선이 붕괴되고 수백만이 목숨을 잃는다. 그때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콧노래 부르듯 말했다. “덴유(天佑)!”

6·25전쟁이 일본을 살리고 부흥시킬 것이라는 자축이다. ‘하늘의 보살핌’이라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주일(駐日) 점령군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의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도 6·25전쟁은 ‘일본의 횡재(windfall)’라고 했다.

한국의 핏빛 상잔(相殘)이 남들에겐 축복이었다. 지난달 요시다의 외손자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무상도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을 치켜세웠다. 영국의 대학에서 “6·25전쟁으로 일본이 ‘운 좋게도(fortunately)’ 일어서게 되었다”고 말한 게 그 일본의 네오콘, 요시다의 혈육이다.

올 6월도 잔혹할 정도로 어지럽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주변국이 호시탐탐 노리던 분할 음모를 제대로 알기나 했는가. 거기 대처할 실력과 정치력, 내부 단합의 역량을 가졌던가. 지금도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러시아, 최대 인구의 중국, 최강 군사력의 미국, 경제대국 일본, 그 4강의 국익 충돌장인 이 땅의 절박한 의미를 알고 합심해서 슬기롭게 대처하는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던 1905년 일본에서 청(淸)나라 우국청년 한 명이 유서(절명서·絶命書)를 남기고 자살한다. 청년 진천화(陳天華)는 서른 나이에 죽으면서 조국을 향해 외쳤다. “내가 약하고 못났는데, 누가 나를 덮치지 않을 것인가? 내가 강하고 잘났는데 누가 나를 감히 넘볼 것인가?”

지금 우리는 이런 물음에 답할 자신이 있는가?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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