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19일에도 그는 문경새재도립공원 관리사무소를 거쳐 새재 제1관문(주흘관)으로 향했다. 662회째 산행. 진 회장은 빠른 걸음으로 새재의 흙길을 걸어가는 등산객들을 먼저 보내며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디뎠다.
그는 5세 때 부친이 운영하던 정미소에 있던 소가 날뛰는 바람에 넘어져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지금 같았으면 치료할 수 있었겠지만 1920년대에는 어쩔 수 없어 다리를 절게 됐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김천고등보통학교에 겨우 들어갔다. 장애인은 입학이 어렵다고 했지만 부모는 “대신 공부는 잘하니 입학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그 뒤 일본 도쿄(東京)대 부근의 조호쿠(城北) 고교에서 문학도의 꿈을 키웠으나 태평양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이후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1949년 대구에 영남석유상사를 설립한 뒤 이를 기반으로 1957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삼미상사를 설립했다.
석유 유통업이라는 한 우물을 판 그는 국내 석유산업의 산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유소’라는 명칭도 그가 1957년에 지었다. 이전까지 주유소는 영어로 ‘서비스 스테이션’이나 일본식으로 ‘급유소’라고 불렀다. 그는 “새재는 내가 살아온 길과 비슷한 것 같아 편하다”고 했다. 새재의 흙길을 밟아야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고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새재를 처음 찾았을 땐 회사일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어. 회사가 부도나냐, 살아나느냐는 갈림길에 섰으니까. 건강도 엉망이었고. 회사도, 나 자신도 침몰할 것 같았거든. 새재를 걸으며 마음을 가다듬은 덕분인지 회사도 안정을 찾았고….”
그는 새재 산행을 하고서부터 자신에게 부족했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1999년 5월 500회 기념으로 주목을 심었을 때는 석유유통협회와 정유회사 관계자들도 와서 삽질을 했다. 새재를 다니며 마음을 모았더니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예로부터 새재를 넘어가면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데서 ‘문경(聞慶)’이라는 지명도 생겼다고 전해져 온다.
진 회장은 2년 전부터 걷는 거리를 줄였다. 원래는 1관문∼2관문 왕복 7km가량을 걸었지만 지금은 4km 정도 걷는다. 기력은 떨어지는데 욕심을 내면 되레 몸에 해롭기 때문.
“요즘 부쩍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늙으니까 다른 걱정은 없는데 사업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그동안 지켜온 내 삶이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져. 새재에 오면 오로지 걷는 데만 정신이 팔리는 거지. 그게 참 좋은 거야….”
그는 문경새재를 찾는 등산객(연간 80만 명)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규칙적으로 새재를 찾다 보니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생겼다. 진 회장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을 때면 지나치는 사람들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곤 한다. 진 회장은 2000년에 삼미상사 대표직을 아들에게 물려줬지만 지금도 오전 7시 반이면 집을 나서 사무실로 향한다. 힘겹게 지탱해 온 회사를 직접 챙기지 않으면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새재에 오기 싫은 날도 있느냐’고 묻자 그는 “장마 때처럼 날씨가 좋지 않아 못 갈까봐 걱정한 적은 있어도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흙길 주변 풍경을 가리키며 “새재는 무척 운치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면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오늘이 662번째지. 1년에 30∼40번 새재에 오니까 700회는 내년에 거뜬히 달성할 거야. 하지만 800회는 좀 욕심이겠지. 주목을 두 그루는 더 심었으면 좋겠는데….”
●진상태 회장은
△1920년 충북 영동 출생
△1939년 경북 김천고등보통 학교 졸업
△1942년 일본 도쿄 조호쿠 (城北)고등학교 졸업
△1949년 영남석유상사 설립
△1955년 삼미상사 설립
△1972년 한국석유협회 5대 회장
△2000년 삼미상사 명예회장
△현재 한국석유유통협회 이사
문경=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