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이다. 지금이야 한국하면 19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삼성 등을 떠올리지만 20, 30년 전만 해도 한국 하면 곧 태권도였다. “미국의 한 뒷골목에서 불량배들을 만났는데 태권도 겨루기 자세를 취하자 그냥 도망가더라”는 얘기는 그 시대 우리들의 신화였다. 배고팠던 시절, 약간은 과장됐을 그런 얘기로 모두들 허기(虛飢)를 달랬던 것이다.
신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준 리(이준구·73)가 있었다. 충남 아산 출신의 이 육군 장교(중위)는 1956년 태평양을 건너가 태권도 하나로 미국을 평정했다. 그는 영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주연 배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동안 길러낸 미 의원 제자만도 300여 명에 이른다. “태권도를 배운 사람들이 모두 한국에 호감을 갖게 되는데 국위선양이라는 게 뭐 따로 있겠습니까.” 그가 늘 하는 말이다.
그가 마침 서울에 왔다. 28일 있을 자서전 ‘그랜드 마스터 준 리’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퇴출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 때문인 듯했다. 그 자신도 서울에 오기 전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게 태권도의 올림픽 잔류를 호소하는 긴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그의 탄식이 깊었다. 50년 태권 인생이 가뭇없이 흔들렸다.
다음달 8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선 태권도를 포함한 28개 경기종목의 올림픽 잔류 여부가 결정된다. 116명의 IOC 위원들이 종목마다 투표를 해 과반수 표를 얻지 못하는 종목은 2012년 올림픽 종목이 될 수 없다. 올림픽 선수단 규모가 매회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만약 태권도가 퇴출된다면 그 자리는 골프 럭비 가라테 스쿼시 롤러스포츠 등 5개 검토(대기) 종목 가운데 하나가 채우게 된다. 지금으로선 가라테가 유력하다고 한다. 퇴출도 기가 막힐 판인데 그 자리에 일본의 가라테가? 태권도인들은 물론 한국 체육계로서도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될 터이다.
태권도가 퇴출 대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IOC 프로그램위원회의 조사 결과 ‘재미가 덜하다’, ‘판정시비가 잦다’, ‘TV 시청률이 낮다’는 의견들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김운용 전 IOC 위원의 스캔들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유야 어떻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종목이 돼 이제 겨우 두 번의 올림픽을 치렀는데 퇴출이라니 이 무슨 낭패인가. 지난해 아테네 올림픽에서 문대성 선수의 그림 같은 왼발 뒤후리기가 아직도 눈에 생생한데….
퇴출을 막기 위한 태권도인들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세계태권도연맹(WTF·총재 조정원)을 중심으로 개혁안을 내놓고 각국 IOC 위원들을 상대로 치열한 설득전을 펴고 있다. 관전 재미도 높이고 판정시비도 줄이기 위해 상대의 주먹이나 발이 내 몸에 닿으면 점수판에 불이 들어오는 전자감응식 호구(護具)를 도입키로 한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럼 정부는 뭘 했는가. 김운용-IOC-청와대로 이어지는 ‘3각 빅딜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도움은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된 듯하다. 빅딜설이란, 한국 정부가 김운용 씨를 가석방해주는 조건으로 김 씨는 IOC에 불리할 수 있는 이른바 ‘김운용 파일’을 공개하지 않고, 대신 IOC는 태권도의 올림픽 잔류를 약속했다는 것인데 사실이라면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 179개국 6000만 태권도인들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빅딜설을 보도하려 했던 한 월간지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기사를 뺀 과정을 놓고서도 ‘정부 압력설’이 나오고 있다. 태권도인들에게 그냥 맡겨 놓았으면 될 터인데 정부가 나서서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든 것 아닌가. 하긴 이 정부가 언제 뭐 도와준 게 있던가. 시거든 떫지나 말 일이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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