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나보다 공부 못하고 예쁘지도 않았던 친구가 순전히 남편 잘 만난 덕에 명품 치감고 나와서 잘난 척하면, 그날따라 일찍 귀가해 밥 달라고 소리치는 남편이 꼴 보기 싫어지는 현상이다. 동창회 증후군 ‘개정 신판’은 다르다. 내가 강남에 안 살면 친구가 아무리 가까웠대도 어디 사느냐고 안 묻는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자석이 있는지 강남 여자들은 귀신같이 몰려 앉아 속닥댄다. “너흰 얼마나 올랐니?” 그날 밤엔 불쌍한 남편 대신 강남을 폭파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우리처럼 선량한 서민이 좁은 아파트를 못 벗어나는 것은 강남 투기꾼 때문이고, 우리 애처럼 머리는 좋은 학생이 서울대 못 가는 것도 강남 사교육 때문이며, 내 남편처럼 성실한 직장인이 ‘사오정’에 떠는 이유 또한 삼성 같은 재벌의 횡포 때문이라는 분노에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좋은 아파트에 못 사는 것이 강남족(族) 탓은 아니다. 그들이 내 재산 축낸 적 없고 그들이 세금 때려 맞는다고 내게 돈이 생기지도 않는다. 정부는 그런 ‘사회적 암(癌)’ 때문에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지만, 법 지키고 세금 잘 냈다면 집 산 일이 죄 될 수는 없다. 강남의 학원이 다 폐쇄돼도 내 아이가 실력 없으면 서울대에 못 간다. 삼성 망해서 내 남편한테 득 될 일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부동산 공급 막고, 공교육 방치하고, 기업을 옥죄어 온 정부에 있다. 그런데 왜 분노할 대상이 아닌 대상을 놓고 수류탄을 휘둘렀을까. 지배층의 이데올로기가 그 사회를 지배한다고 했다. ‘강남 불패’를 용납 않겠다는 대통령, 서울대가 사회적 배려 없이 학력(學歷) 세습을 꾀한다고 비판하는 대통령교육문화비서관, 삼성 지배구조에 문제 있다는 여당 의원들의 발언이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을 세워야 정부 잘못이 표 나지 않는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반공논리가 사고(思考)를 마비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정부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그치지 않고 ‘계급투쟁’까지 벌인다는 점이다. 난데없는 금기어(禁忌語)로 색깔론 펼치자는 게 아니다. 사회 유지를 위해선 사회적 불평등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계층론의 입장과 달리, 참여정부는 ‘평등선(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계급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지겨운 보수-진보 구도 대신, 한줌밖에 안 되는 ‘성공한 사람들’을 대립계급으로 설정함으로써 아군을 무한 증식시킨 전략은 탁월하기까지 하다. 민주냐 반(反)민주냐, 성장이냐 분배냐의 갈등구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도 창의적이다. 개개인의 경제적 처지는 개인적 요인 아닌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됐고, 그러므로 사회제도를 개혁해 구조적 불평등을 없애야 한다고 역설해 온 것도 먹혀드는 분위기다. 계급투쟁을 통해 구(舊)지배계급을 도태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이 계급투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정책들이 왜 나왔는지 수수께끼 풀리듯 알 만해진다. 참여정부가 과거사법을 비롯한 ‘개혁입법’과 행정도시 건설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도 능히 알 수 있다. 2년 반 안에 외환위기나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누가 뭐래든 계급투쟁이 계속될 것도 분명하다. 이제 대한민국은 동창회 증후군 없는 속 시원한 사회로 거듭날지 모른다. 다만 경제에 대해선 기대하지 않아야 정신건강에 좋다.
정부가 경제지휘관 겸 보호자를 자처하고 경쟁보다 연대(連帶)를, 개인보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나라는 도덕적이긴 하되 경제성장은 어렵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리더가 부(富)를 죄악으로 보고 징벌하는 국가에서 국민이 잘살게 된다면 노벨경제학상이 쏟아질 일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