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필자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대목(大木) 신영훈 선생이 쓴 ‘우리 한옥’을 보면 프랑스 파리 근교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그림 같은 한옥’이라고 한다.
고암은 파리에서 활동하다 타계한 이응로(李應魯·1904∼1989) 화백의 아호고, 고암서방은 부인 박인경(朴仁景) 씨가 1992년 신 선생에게 부탁해 지은 기념관이다. 짓는 과정 내내 프랑스 건축가들이 우리 목수들의 전통 건축기법에 놀라고, 그래서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애를 많이 먹었던 모양이다.
한옥은 못을 쓰지 않고 결구(結構)로 짓는 집이다. 나무가 쉽게 갈라지면 안 된다. 강인한 우리 소나무만이 지붕의 무거운 하중을 버티고 결구를 감내할 수 있다. 마침 강원도 홍송(紅松)을 구할 수 있었다. 신 선생은 홍송을 치목(治木)한 뒤 배편을 이용해 직접 파리로 실어 나르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문제는 적도였다. 긴 항해 중에 무더운 적도를 지나면 나무가 뒤틀려 목재로 쓸 수 없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었다. 신 선생은 닥나무 한지(韓紙)에 풀을 먹여 목재 하나하나에 정성껏 ‘옷’을 입혔다. 파리에 도착한 홍송은 건재했다. 한지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한지가 마르면서 나무를 옥죄어 뒤틀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고암서방이 건축을 알고, 미술을 아는 파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저간에는 이런 ‘멋진 노력’들이 있었다. 상상해 보라. 홍송이 한복을 차려 입고 원행(遠行)에 나서는 그 모습을.
파리 7대학 한국학과의 마르틴 프로스트(53) 교수는 아마 그 모습을 상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청마루를 알 것이고,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화단을 알 것이다. 처마를 두들기고 화단가 채송화를 놀래 주는 여름 소낙비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동양학부장을 졸라 내년 봄 새로 들어서는 학부 건물에 ‘한국 정원’을 만들자고 했을 것이다(본보 8월 5일자 A15면).
정원 설계도를 만들어 대사관에도 보내고 한국국제교류재단도 설득하고 굴지의 한국 기업 2곳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타당성이 없다’거나 무응답이었다. 7대학 총장까지 나서 ‘대한민국 최고 기업’에 편지를 썼지만 마찬가지였다. 물론 처음에 도움을 요청한 돈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150만 유로니까 우리 돈으로 18억 원쯤 된다.
한국학을 알리기 위한 국제교류재단 적립금이 2500억 원이나 되지만, 써야 할 곳을 생각하면 그리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학과 지원도 아니고, 무슨 정원이냐는 소리도 나올 수 있다. 그래도 ‘타당성이 없다’는 말은 차마 듣기 민망하다.
프로스트 교수는 ‘욕심’을 줄였다. 예산도 50만 유로로 낮췄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기업에 대한 기대는 접었다. 대신 프랑스 기업에 손을 내미는 중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그를 볼 낯이 없다.
10여 년 전 적도를 통과하기 위해 목재 하나하나에 한지를 입히던 어느 목수의 손끝이 눈에 선하다. 그저 숙연할 따름이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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