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정보 수사기관이 아닌 한 민간 연구소가 현재도 아닌 60년 전, 100년 전 인물들의 친일 행적을 조사하고 발표하겠다니 그건 처음부터 ‘미션 임파서블(불가능한 사명)’일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체험한 세대에도 쉽지 않은 과거사 정리를 다만 얻어들은 얘기와 불확실한 기록에 의지해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명단을 보니 이름 석 자의 오기쯤은 애교로 봐 준다 쳐도 그때를 산 사람에겐 너무나 명백한 사실의 착오도 금방 눈에 띈다. 가령 ‘황국신민의 선서’를 마련한 인사가 1943년 전북 지사로 있었던 것을 전북 군수로 격하해 놓았는가 하면 일제하에서 내내 양심적인 변호사로만 청빈하게 살아 온 한 법조인을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지방법원장’이라는 광복 후 관직명을 뒤집어씌워 ‘친일 판검사 명단’에 쑤셔 넣고도 있다.
그러나 이번 명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왜정 시대의 관리, 군인을 일정한 계급을 기준으로 ‘친일’ 여부를 자로 재듯 구분한 범주화다. 군수는 친일이지만 면장은 아니고, 소위는 친일이지만 준위, 군조(軍曹) 또는 ‘겐페이 고초(헌병 오장)’는 아니라는 투다. 무분별한 기준이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그건 마치 6·25전쟁 당시 인공 치하에서 사람이 어떤 사상을 지니고 어떻게 살아 왔느냐보다 오직 ‘출신성분’을 따져 반동 여부를 가리던 옛날을 불길하게 연상시킨다.
‘그때’의 기록이 아니라 그때를 산 사람의 기억엔 일제강점기의 군수 중에는 동포애를 간직한 양심적인 ‘친일’ 인사도 있었고, 면장 중에도 일본인 못지않게 악질적인 ‘비친일’파가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도 지주 출신의 소시민 중에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양심적인 ‘반동’이 있었고, 출신 성분이 완벽한 ‘기본 계급’의 ‘동무’ 중에도 악질적인 ‘비반동’은 적지 않았다.
나치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나온 사람의 보고에 의하면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간수 중에는 자기 주머니에서 적지 않은 돈을 털어 몰래 약을 사와 병든 수인(囚人)에게 건네준 친위대원도 있었는가 하면 ‘카포’라고 부른 ‘수인 대표’ 가운데에는 같은 수인인데도 수용소의 전 친위대원을 합친 것보다 더 가혹한 유대인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 정신병리학자가 체험한 강제수용소’라는 이 보고서를 쓴 빅토르 프란클 교수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이 지상엔 품위가 있는 선의의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다. 하지만 오직 전자만으로, 혹은 오직 후자만으로 구성된 집단은 없다. 그 점에선 어떤 집단도 순혈(純血)은 아니다. 그래서 수용소의 간수 중에도 선의의 인간은 있었다.”
그렇대서 강제수용소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과거사 정리’를 위해 눈을 비비고 ‘카포’들을 찾아 나섰을까. 프란클과 같이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또 다른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종전 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유대인 기록센터’라는 연구소를 차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가해자를 색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1962년 살인마 아이히만을 남미의 도피처에서 10여 년의 추적 끝에 잡아와 재판에 회부한 것도 그였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과거사 정리는 그 추적 방향이 빗나가 있다고 나는 본다. 정작 시급한 일은 일제가 식민지 한국의 백성들을 얼마나 어떻게 박해했고, 그 가해자가 누군지 밝혀내는 일이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징용에 끌려가 죽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는지, 그 수나마 알고 있으며 알려고 충분히 노력해 보았는가. 가해자의 가해 실상에는 눈을 감는 반면 피해자끼리 부역 추적에만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그런 자학(自虐)사관에 탐닉하고 있는 민족에 대해 가해자 일본이 뭐가 급해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말인가.
최정호 칼럼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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