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예산 나눠먹기’가 부른 美 재앙

  • 입력 2005년 9월 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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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하원 의원 535명은 의회가 여름휴가에 들어간 8월 한 달 동안 지역구를 찾아 휴식을 겸한 의정 홍보 활동을 벌였다.

올여름 귀향 활동에서 가장 어깨에 힘을 줬을 정치인은 아무래도 알래스카 주 소속 의원 3명(상원 2명, 하원 1명)일 것이다. 올해 7월에 통과시킨 2006년 예산안에서 알래스카의 교통 지도를 새로 그릴 ‘큰 사업’을 위해 5000억 원을 따냈기 때문이다.

이 돈은 국방비만 연간 400조 원을 쓰는 상황에 비춰 볼 때 그리 큰 액수는 아니다. 그러나 사업 내용을 들여다보면 납세자가 낸 세금이 이렇게 쓰여도 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2500억 원은 인구 1만4000명인 케치칸 지역 주민이 인근 섬에 있는 공항으로 편리하게 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를 짓는 데 배정됐다. 설계도가 그려지기 전부터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나 뉴욕 브루클린 브리지와 맞먹는 규모를 자랑할 것”이란 말이 나온다. 2300억 원은 주도(州都) 앵커리지와 늪지대에 있는 낡은 항구를 잇는 교량 건설에 쓰일 예정이다.

케치칸 공항 도로는 알래스카의 유일한 하원 의원인 돈 영 의원의 이름을 따서 ‘돈 영 웨이’가 됐다. 다리를 지나다니는 유권자들이 영 의원이 이 다리를 지어 줬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하도록.

이런 예산 배정이 만성 재정적자로 바닥을 드러낸 미국 정부의 곳간 사정을 고려할 때 올바른 씀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치학 교과서는 이런 예산 나눠 먹기를 전형적인 ‘포크 배럴(pork barrel) 정치’라며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전에도 나와 있는 말로, 정강이살(hind foot), 허벅지살(ham), 갈비살(spareribs), 안심(picnic shoulder)처럼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살을 떼어내는 데서 나온 표현이다. 미 언론 역시 7월 말 예산안이 통과된 뒤 이런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언론이 이런저런 기사를 통해 “어느 의원이 (지역구에) 베이컨(선심성 예산)을 두툼하게 챙겨 갔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사실상 ‘기존의 관행’을 현실로 인정하는 듯한 보도 자세다.

2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부른 뉴올리언스 재앙의 현장을 찾은 기자의 머릿속에는 몇 년 뒤 알래스카 외딴 지역에 새로 지어질 2개의 멋쟁이 다리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호수보다 낮은 저지대에 세워진 인구 50만 명의 뉴올리언스를 지탱해 온 것은 두께 50cm가량의 콘크리트 제방이었다.

루이지애나의 공대 교수들은 오래전부터 “보수가 필요하다, 새로운 구조물 건축이 시급하다”고 경고했지만 예산은 끝내 배정되지 않았다. 주 정부의 복지부동 때문인지, 남부의 가난한 주 소속 의원의 정치력 부족 때문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10, 20년 전에 힘센 다른 주 의원들이 챙겨간 예산이 우선순위에 따라 제대로 배분됐다면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의 참사를 막아낼 구조물 보강에 쓰였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여의도 정치권도 9월 정기국회가 열리면 10월 말부터 비슷한 ‘예산 나눠 먹기’ 시도를 되풀이할 것 같다. 이 문제는 ‘법대로’를 강조하던 과거 거대 야당 총재도, 개혁의 화신인 현직 대통령도 “이래선 안 된다. 우리 자성하자”고 말한 바 없는 성역(聖域) 같은 사안이다.

이런 폐습은 어쩌면 다음 선거 당선을 위해 의원들이 유권자에게 내세울 유일한 ‘전과(戰果)’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석유 값 인상 이외에는 나와 무관할 것만 같았던 뉴올리언스 재앙의 원인을 한국 정치권이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뉴올리언스에서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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