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씰크로드학’을 보면 바야흐로 우리에게도 세계적인 학문이 잉태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바로 ‘씰크로드학(The Silkroadology)’이다. 이는 인류 문명 교류의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동서문명사 연구자인 정수일 교수가 제창한 학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세 중앙아시아의 동서를 잇는 통로로만 알려졌던 실크로드를 구석기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를 새롭게 관통하는 키워드로 제시한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된 인류 문명의 교류상을 새롭게 정립했다. ‘씰크로드학’의 개념과 내용 및 의의, 실크로드의 전개 과정, 이 길을 통해 진행된 각종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교류상, 그리고 이 길을 통한 교류의 문헌적 및 유물적 전거 등을 810쪽에 담아 논리정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수천 년 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진행되어 온 문명교류의 역사와 제반 현상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역저다. 물론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반부터 세계적으로 상당히 축적돼 왔다. 그러나 대부분 중앙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교통사나 지역학 또는 몽환적 이미지의 이색 취향에 그쳤었다.
이 책은 종래 학계에서 제시한 실크로드 개념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환(環)지구적 문명교류 통로의 개념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각별한 독창성이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오아시스를 연결한 ‘오아시스로’와 북방의 ‘초원로’, 실크로드를 대체한 것으로 간주되던 바닷길인 이른바 ‘향료길’까지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17세기 스페인이 이용했던 ‘태평양 비단길’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켰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17세기까지, 오랜 세월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된 동서문명 교류를 다루면서 종래의 제한적 실크로드의 관점을 타파한 점, 15세기 이래 신구 대륙 간에 교류가 이뤄졌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실크로드의 범위를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확대한 점은 신선하다.
세계 문명 교류의 중심이었던 실크로드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고대 한국이 이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었다는 시각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유럽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역이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로써 고대 한국이 세계사의 변방이 아닌 세계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 책에서 정 교수의 주장은 아주 분명하다. 문명은 서구인들만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류공동의 소유물이라는 대목에서는 독자들 역시 크게 공감할 것이다. 이런 진일보한 역작이 탄생한 곳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감옥이었다. 정 교수는 ‘외국인 위장 간첩’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 기소돼 1996년 7월부터 2000년 8월까지 복역했으며 2003년 5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옥중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며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해 출옥 후인 2001년 이 책을 출간했다. 동서문명교류사의 역저는 그렇게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박진호 문화재복원 전문가 전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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