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는 1888년생. 1910년 당시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 홍범식이 일제의 병탄에 항거하여 순국하자 이 땅을 떠나 중국, 남양 등지를 떠돌았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의 선봉에 선 선각자였다.
그가 ‘임꺽정’을 집필한 것은 1930년 전후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총 1120여 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방대한 분량의 저작에서 홍명희는 서울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송도, 강서 구룡산, 영변 묘향산, 백두산, 금강산에 이르며 남으로 장흥, 보성, 순천, 지리산, 양주, 화개, 하동, 창녕, 문경새재 등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역을 오가며 임꺽정의 행로를 그려 낸다.
임꺽정과 일곱 의형제의 활약상을 따라가며 읽노라면 소설은 한국판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흥미진진하며 홍길동, 전우치의 후예인 듯 기이한 임꺽정의 행적, 걸출한 무술은 무협지처럼 우리를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임꺽정’은 전투와 싸움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에 생생하게 재현된 임금과 왕비, 옹주와 후궁, 세자와 왕자들이 빚어내는 궁중의 사연들, 고관대작들이 벌이는 사화는 우리의 역사 공부를 돕는 한편 오롯이 살아 있는 당대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삶은 우리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그 속에는 사랑이, 치정이 있고 배반과 음모가 있으며 방랑과 좌절과 암투가 있다.
힘센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난한 이들이 죽일 듯 미워하며 영위해 나가는 한 생은 엄숙하고 진지하다. 여인과 남정네가 등장하는 그림은 선 곱고 화려한 채색화 같고 어린아이와 나이든 이가 어우러져 그리는 그림은 투박하나 선명한 민화처럼 다가온다.
“민족 자료의 집대성이요,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語海)”라 평했던 이효석의 말처럼 ‘임꺽정’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과 잊고 있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넘친다. 소설을 읽으며 꺽정과 곽오주, 천왕동이와 함께 산을 타며 호랑이와 숨 막히는 일전을 벌이고 토끼와 여우, 노루를 쫓으면서 우리는 500년 전 조선의 벽화 속으로 들어간 듯, 꿈속의 한 장면을 만난 듯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알려진 대로 홍명희는 광복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8년 분단을 막고자 월북한 후 남하하지 못하였다. 그는 격동기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온몸으로 시대를 앓던 작가였으며 소설 ‘임꺽정’은 그의 그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대작이다.
‘임꺽정’을 두번 세번 거듭 읽으면 역사란 무엇인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 모습인지, 나는 대체 누구인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작가의 맨얼굴이 다가오고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인다. 짧고 빠르고 간결한 표현이 미덕인 이 시대. ‘임꺽정’은 1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힌다. 홍명희의 천재성일까, 임꺽정의 힘일까.
서하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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