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네스코의 희곡들은 재미있다. 무대에 올려진 연극을 보지 않고 희곡만 읽어도 소설을 읽는 것 못지않은 재미가 있다.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등 수많은 그의 희곡을 읽다 보면 무대 위의 장면들이 훤히 보이는 듯하면서 그 황당하고도 기발한 이야기에 금방 매료된다. 이오네스코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들이 희곡만 읽어서는 그다지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대머리 여가수’는 스미스 부부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그들의 대화는 점차 황당무계하게 변해 가기 시작한다. 가령 환자의 간을 수술하기에 앞서 멀쩡한 자신의 간을 먼저 수술해 본 의사의 이야기라든가, 2년 전에 죽고 3년 전에 신문에 부고가 나서 1년 반 전에 장례식에 갔던 “대영제국에서도 가장 멋진 시체”였던 잡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그때 마틴 부부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방문하는데, 마틴 부부는 자신들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에 하녀와 소방대장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처음에 그저 황당한 코미디처럼 보이던 이 연극은 점차 인간의 근본적 비극, 즉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가 하는 걸 여실히 드러낸다. 이런 것을 두고 희비극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희비극이다. 가령 ‘의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무대 가득히 빈 의자들을 갖다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폐하를 맞아 감격에 겨워하는 노인과 노파의 행동을 보노라면 충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돌이켜 보면 이오네스코 이전의 연극은 구체적인 어떤 문제를 다루었다. 헨리크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안톤 체호프는 ‘벚꽃 동산’에서 몰락해 가는 귀족을 통해 인간의 페이소스를 다뤘다. 그러나 이오네스코와 베케트에 이르면 이런 개별적인 문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오네스코 자신은 “내 눈에 우스꽝스러운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통찰력이 50년대 작가들의 천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오네스코의 그 빛나는 연극들을 우리나라 대학로에서는 무대에 올릴 수가 없다고 한다. 관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일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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