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도 그들이 노래하는 한 코드였다. 오죽하면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광주여, 무등산아 하고 외치며 무등산의 흙을 한 삽씩 퍼가는 통에 무등산이 사라졌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을까? 이렇게 그들은 민족적 현실과 역사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1960년대적 현실만 해도 동족상잔의 깊은 상처로 말미암아 민족의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인은 예술지상주의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신동엽은 대학의 연구실이나 찻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단자(單字)미학이나 어구 나열법에 하염없이 신경을 쓰고 있는 그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 비판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 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철저히 언어 세공만을 전업으로 삼아 외래 사조에 휩쓸려 제정신을 못 차리는 비주체성을 통렬하게 공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나 불경이나 오천언(五千言·노자 도덕경) 같은 인류 유산 가운데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준의 절절한 시편, 즉 ‘전경인(全耕人)’ 정신이 투영된 거대한 시편들을 쓰고자 했다. 그에게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이었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민족사의 시원(始原)에서부터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을 관통하면서 ‘연민이 아는 민중의 고통, 분노가 보는 사회의 혼란과 불의, 그리고 하늘의 이상’(김우창)을 절절하게 노래한 장시 ‘금강’에서는 역사에 대한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그의 강렬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시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세계는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이었다. 그 세계는 ‘모오든 쇠붙이’는 사라지고 오로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아 있는 세계여야 했다. 곧 분단이 해소되어 인간의 가능성을 한없이 열어 가는 통일된 조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시에서 구호적인 냄새는 맡을 수 없다. 동시대의 또 다른 탁월한 시인 김수영이 “강인한 참여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1950년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면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수준 높은 경지로 노래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시인이었다.
한기호 출판평론가 출판마케팅연구소장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