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우 책으로 접하기 전 저자를 먼저 알게 되는 경우가 몇 차례인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형식의 극치를 달리는 박물관 개관 행사에서. 각오를 하고 축하하는 마음을 가득 모아 자리를 지키는 터에 축사를 하는 명사로 바로 그가 자리했던 것이다. 적절한 예를 들면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렁차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축사. 개관 행사에서 형식에 그치기 마련인 축사를 들으면서 감동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부터 나는 팬이 되어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씌어진, 그가 30대에 썼다는 책까지 더듬게 된 것은 그렇게 시작된 관심 때문이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미 제목이 정해질 때 세월을 넘어설 각오를 했던 것만 같다. 뭔가 본질을 건드리는 냄새가 가득 느껴진다.
1962년 약 두 달에 걸쳐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에 주해를 달아 실은 것이라 한다. 신문사의 마감시간을 앞두고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글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의 뛰어난 구사력 때문인지 글의 흐름은 마치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 같다. 내가 경험한 축사와 같이 여유로우면서 예리하고 우렁찬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그의 목소리가 문장마다 들리는 것, 문어체와 구어체의 경계를 깨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힘이기도 하다.
근대를 넘어서는 세대들에게 관통하는 한국문화의 풍토를 집어내, 너무나 친숙하여 무감각한 한국 문화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씌어졌던 글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조.
저자는 또 벽이 없는, 소유하지 않는, 비어 있는 그리고 사방으로 내다볼 수 있는, 그리고 상대에게도 볼거리를 주는 쌍방향의 시점 교환으로서 정자를 바라본다. 당시 우리 정자에서 인터넷이니 인터랙티브니 인터페이스니 하며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터(inter)의 의미를 찾아내 개념화시킨 관점은 참으로 놀랍다.
옛것에서 탈피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주관심사였던 시대에,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가진 것은 당연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에, 매우 익숙한 한국의 지리적 조건과 우리의 언어와 풍습, 의식주문화, 생활용품 속에서 일상이 아닌 한국성을 읽어내는 예리한 족집게 안목이 가득 나열되고 있는 창고다.
세상에 처음 이 글들이 나왔을 때 이러쿵저러쿵 충돌도 있었던가 보다. 40년 만에 재발간된 저서 뒤쪽의 Q&A가 그야말로 쌍방향 소통을 통한 논리전개의 일환이 되어주어 더욱 흥미진진하다.
유행이 아닌 맥을 짚고 있으니 시간 속에 더욱 증명되고 소중해진다. 저자의 관점이 길을 찾아가는 나그네에게 희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절실한 표지판이 되어준다. 재발견과 공감 속에서 해답을 쥔 듯하면서, 그러나 바람같이 잡히지 않는 이 책과 틈틈이 씨름 중이다. 앞으로 40년 더 곁에 두고두고 읽다 보면 아련히 느껴지는 희망과 가능성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련다.
한젬마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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