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핸은 국가 간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착안한 학자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자유무역의 증대, 정보화 등으로 국가 간에 교류와 협력이 늘면 서로 의존하게 되는데 이런 의존성이 국제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무정부 상태여서, 결국 국가 간 힘(power)의 관계가 체제와 질서를 결정짓는다고 믿는 현실주의자들과는 관점이 다르다. 성선설(性善說)의 눈으로 국제관계를 본다고나 할까.
코핸을 비롯한 자유주의 학자들의 상호의존성 이론은 남북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이를 계승한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이 모두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대북(對北) 포용정책은 상호의존론을 기초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 간에 교류 협력―엄밀히 말하면 남한의 대북 지원―이 늘면 늘수록 서로 의존하게 되고, 이 의존성으로 인해 남북은 대결보다도 공존, 공영을 택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가 엊그제 “2010년까지 5년간 북한의 전기 농업 경공업 수산 광업 분야에 총 5조2500억 원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힌 것도 상호의존성을 키우겠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여기에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대로 에너지, 물류, 통신 인프라까지 깔아 주게 되면 지원은 천문학적 규모에 이르게 되고, 남북관계는 본격적인 ‘상호의존 심화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상호의존성이 커지면 아무래도 긴장이 줄어들고 무력 충돌 가능성도 낮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피해 가야 할 함정도 만만치 않다. 상호의존성이 큰 만큼 의존관계가 깨질 경우 맞게 될 위험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없이 살았으면 몰라도 있다가 없는 삶은 더 견디기 어려운 이치와 같다. 북한은 최근 비누 2만 t, 의류 3만 t, 신발 6000만 켤레 분까지 요구할 정도로 남한에 의존하고 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신겨 주기까지 하다가 갑자기 관계가 끊기면 북한 사회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고, 긴장이 고조될 것은 자명하다.
상호의존의 그물망이 아무리 촘촘하다고 해도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정치, 안보, 영토 문제가 발생하면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더 비관적인 지적도 있다. 상호의존론자들이 가장 아프게 여기는 점이 바로 이 대목인데 남북관계야말로 그런 위험에 노출돼 있다. 핵이나 인권 문제로 북-미가 충돌할 경우를 상정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대북 지원이 이런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주고 뺨 맞는 정도라면 웃으면서라도 맞겠지만, 남북관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긴장과 대결로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북이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역시 중요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북한 사회를 마치 통째로 바꿔 주기라도 할 것처럼 인심을 쓰는 것은 현책(賢策)이 아니다. ‘대북 지원 5개년’ 식으로 지원 기간을 명시하는 것도 슬기롭지 못하다.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다음 정권이 이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을 따르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렇게 입찬 소리를 했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할 텐가.
그렇지 않아도 ‘DJ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대북 지원으로 북한은 상대적인 안정을 찾은 반면 남한은 남남갈등과 정체성 혼란으로 북한보다 먼저 급변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국회 국방위원회의 연구용역 보고서)는 경고가 나오는 판이다. 대북 지원은 남북 간 상호의존의 수준을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그런 고려 없이 이뤄지는 대북 지원은 순수성마저 의심받게 만든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대북 포용정책은 이 정권의 활로(活路)를 찾기 위한 ‘대남용’일 뿐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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