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경환]내 전화기엔 ‘쥐와 새’가 없을까

  • 입력 2005년 11월 17일 03시 07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예로부터 우리는 불신 속에 살아왔다. 우리만이 아니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이웃 나라 속담도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의 운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바뀌는 일이 무수했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아닌 시절, 가마득한 그 옛날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언론과 사생활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에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인 줄 알았다.

임동원, 신건 전직 국가정보원장 두 사람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본인들은 몰랐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그들이 책임자로 재직할 때 국정원이 많은 사람의 일상적인 대화를 조직적으로 불법 감청했다고 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도청이 있을 수 없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던 일이 씁쓸하게 되살아난다.

이렇듯 부끄러운 일을 두고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전직 대통령 측의 반응이다. 두 사람을 형사 절차에 회부하는 것을 심히 불쾌히 여기며 노골적으로 반발한다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국민 앞에 사죄해도 모자랄 일인데 말이다. 하기야 두 사람의 구속을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구시대의 정치 윤리와 의리를 들먹인다면 말이다.

어느 외국인의 평가가 생각난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의 공통된 업적이라고는 전임자의 비리를 밝혀내는 일뿐이다.” 믿었던 후계자에게 배신당했다며 분노하던 전직들의 모습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불의와 불법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역사를 세우겠다는 명분과 의지는 당시에는 일견 신선하고 비장하게까지 비쳤다. 그러나 결과는 많은 경우 정치적 보복과 책략에 그치고 말았다. 후임자들도 마찬가지로 보복과 수모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두 전직 정보기관장의 구속이 정치적 동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의심은 거두어야 할 것 같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지른 조직적 불법행위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노무현 정부이지만 한 가지 업적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과거처럼 검찰을 정권의 시녀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총장의 항명성 사임으로 종결된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 사건도 과거에 비해 향상된 검찰권 독립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비록 법무부 장관의 지휘로 검찰의 의사가 꺾였지만, 예전 같으면 검찰이 자기의 뜻을 명료히 밝히지도, 그를 통해 문제를 공론화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한 법원에 대해 ‘한통속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세력이 있다면 부적절하다. 최근 모 교수와 경제인 사건을 통해 새로이 정착되어 가는 ‘불구속 수사의 원칙’에 흠이 생겼다고 볼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진술에 신뢰성이 없는 두 사람을 구속 수사하지 않으면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 법원이 판단했으니 말이다. 조용히 수사와 판결을 지켜볼 일이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재삼 다짐해야 할 일은 한시바삐 치욕스러운 ‘쥐 공화국’, ‘새 공화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행여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용하는 전화선에 귀를 대고 있는 쥐나 새는 없을까, 이런 의심이 팽배한 나라에서는 국민생활 평온과 나라의 번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덧붙여서 강조할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의 독립이나 국정원의 합법적인 본연의 업무 수행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두 기관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대들보이기 때문이다.

안경환 서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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