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靑島)는 산둥 반도의 미항. ‘붉은 기와, 푸른 수목, 파란 바다, 남색 하늘(紅瓦 綠樹 碧海 藍天)’로 유명한 자못 유럽풍의 칭다오 풍광은 일찍부터 ‘중국의 나폴리’라고 일컫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칭다오에는 사람의 기를 꺾는 중국문화의 ‘거대(巨大)주의’, 중국식 바로크의 눈과 귀가 따가운 시끌시끌한 장식들이 별로 없어 마음이 편하다.
한 도시는 두 번째 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10년 전 칭다오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구시가지 위쪽으로 해변을 따라 고층 빌딩을 짓기 시작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번에 가 보니 마천루가 숲을 이룬 신시가지는 칭다오를 ‘중국의 리비에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이 신시가지의 압권이 5·4광장. 시 청사 앞에서 해변으로 뻗은 긴 잔디공원과 해안을 따라 펼쳐진 잔디공원이 교차하는 십자로 중앙에 마련돼 있다. 1919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이어 같은 해 5월 4일부터 중국 전역에서 2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일(反日)애국운동을 기념하는 광장이다. 광장 한복판에는 비행기에서도 내려다보이는 붉은 기념탑이 서 있다. 회오리치는 5월의 바람을 상징한다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 구경 못 했던 구시가지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별장, 마오쩌둥(毛澤東)의 영빈관 등도 이번에 둘러봤다. 도대체 장 총통의 별장을 그대로 보존 공개한다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대국다운 풍모다. 내용은 읽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매점에는 ‘청년 시절의 장제스’ 등 관련 책자들도 팔고 있었다.
독일이 칭다오를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1903년에서 1908년까지 총독 관저로 쓰기 위해 지은 영빈관 건물은 일본의 난징(南京) 괴뢰정부 주석 왕자오밍(汪兆銘)도 거쳐 갔고 1957년에는 마오 주석이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회의를 개최했다. 실내 배치며 가구집기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정치국 면면들을 보면 저우언라이(周恩來) 류샤오치(劉少奇) 주더(朱德) 덩샤오핑(鄧小平) 천이(陳毅), 그리고 린뱌오(林彪). 해외의 한 한국 학자가 북한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네 아니네 하며 말썽이 났을 때 대체 정치국이 뭔가 싶은 사람들에겐 위에 든 이름들로 그 비중을 짐작하면 될 것이다.
역사와 현대사를 이처럼 소상하게 간직하고 기념하고 있는 외국의 도시들을 구경할 때마다 나는 남북한을 포함해서 한반도의 미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령 앞으로 20∼30년 안에 통일이 된다고 생각해 본다. 그때의 한반도 북쪽의 모습은 천하제일의 명산 금강산에서부터 모든 도시와 농촌이 김씨 세습왕조의 ‘유일 역사’로 도배질이 돼 있겠고 앞으로 그 흔적을 다원적인 역사유물로 중화시키는 데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한편 한반도 남쪽의 모습은 단 하나의 제대로 된 역사적 기념물도 공공광장도 없이 오직 그 높이와 사치를 서로 다투는 주상복합빌딩의 숲만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북쪽에는 굉장히 뻑적지근한 ‘개인 역사(?)’가 버티고 있고 그 남쪽에는 모든 역사와 단절된 ‘무(無)역사’가 자리 잡고 있겠다고 생각해보니 끔찍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생활공간 속에 살리는 일을 좀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돈이 별로 들지 않을 일도 얼마든지 착수할 수가 있다. 우선 이름을 바꾸는 일이다. 가령 애매한 이름을 제대로 완전한 이름으로 복원할 수 있다. 세종로를 ‘세종대왕로’로, 또는 무슨 추상명사 같기도 한 ‘충무로’를 ‘이충무공로’로, 그보다 더욱 좋게는 일본인 관광객도 알아볼 수 있는 ‘이순신장군로’로. 그리고 고구려 역사 지키기의 일환으로는 가령 ‘을지로’를 ‘을지문덕장군로’로….
최정호 객원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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