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유치를 신청했던 부안. 그 후 2년간 찬반 주민의 대립 속에서 ‘부안 사태’로 불리는 홍역을 치른 그는 ‘부안의 아픔’이 잊혀지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다. 부안군은 8월 말 산업자원부에 방폐장 유치를 신청했지만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됐다. 결국 방폐장 용지는 경북 경주시, 포항시, 영덕군과 전북 군산시의 4파전 끝에 11월 2일 경주로 확정됐다.
주민이 그토록 반대했던 사업이 불과 얼마 후 지역마다 서로 유치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사업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안에서 방폐장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국민 사이에 원자력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고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어찌됐든 부안의 아픔이 방폐장 용지 결정의 밑거름과 참고서가 된 셈입니다.”
그는 우연한 계기에 방폐장 유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민선 2기 군수선거에서 떨어진 뒤 지역 신문사에 놀러 갔다가 ‘방폐장 유치 지역에 3000억 원 지원’이라는 기사를 보고 “내가 군수라면 이런 기회를 잡겠다”고 말했다.
당시 행정자치부와 산자부는 “일단 신청만 하면 정부에서 홍보와 치안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유치 신청을 한 뒤 주민에게 가장 많이 들어야 한 질문은 두 가지였다. 왜 너 혼자 나서느냐는 것과 방폐장이 그렇게 좋다면 우리 부안에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는 “무엇이든지 경쟁 구도로 가면 돌아오는 게 적기 때문에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두 번째 질문에는 “부안만이 유일하게 신청했기 때문에 결국 부안으로 온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주민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정부 관계자에게서는 ‘애국자’ 소리를 들었지만 주민들에게서는 ‘매향노’ ‘핵종규’로 불리면서 집단폭행을 당했다. 1년 넘게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관내 식당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요즘엔 먼저 손을 내미는 주민이 있지만 20여 일 전에는 행사장에서 막걸리 세례를 받았다. 군수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주민도 있다.
“신청 전에 충분한 여론 수렴이 부족했던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시 일정상으로는 신청 이후 사업 시행까지 1년의 여유가 있어 추후에 주민을 설득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최근 부안 진실화해협의회를 구성하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3’이라는 숫자를 테마로 하는 ‘33바람부안축제’를 여는 등 지역 민심을 봉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부안 문제 해법으로 사면 복권과 피해자 보상, 지역 성장동력 제시, 정부의 공식 위로 메시지 등 4가지를 제시했다. 부안진실화해협의회와 애향운동본부도 방폐장 유치 찬반 활동 과정에서 발생한 45명의 구속자 등 주민 400여 명에 대한 사면 복권을 요구했다.
“지금도 후회는 없고 같은 상황이 온다면 다시 신청할 겁니다. 부안 문제는 치유나 보상 차원이 아닌 정부가 필연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안입니다.”
부안=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김종규 군수는▼
△1951년 전북 부안군 위도 출생
△1968년 전주 영생고 졸업
△1977년 전주대 법학과 졸업
△전주대 총학생회장
△1984년 전주대 대학원 법학석사
△전라중, 전주영생여상 교사
△호원대 겸임교수, 전주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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