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팔순 맞은 작가 박경리 씨가 말하는 ‘희망’

  • 입력 2005년 12월 10일 02시 54분


박경리 씨는 “눈이 내리고 나니 오봉산에 사는 토끼나 고라니까지 토지문화관으로 내려온다. 그걸 보면 나도 오봉산 아래 사는 억조창생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박경리 씨는 “눈이 내리고 나니 오봉산에 사는 토끼나 고라니까지 토지문화관으로 내려온다. 그걸 보면 나도 오봉산 아래 사는 억조창생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여기 원로 작가인 박경리 씨가 있다. 그가 지난달 29일 팔순을 맞아 딸 김영주 씨, 사위 김지하 씨, 외손자 원보, 세희 씨와 함께 나란히 케이크를 자르던 모습은 오랜 여로 끝에 행복한 한순간을 맞은 일가의 모습으로 여러 사람의 눈에 남았다. 그는 이날 말을 아꼈다. “오래 살아 염치없다. 이룬 것보다 더 인정받아 송구스럽다.” 그렇게 말했다.

공자는 삶을 돌아보며 일흔까지만 말했다. 일흔 살이 되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일흔 살을 ‘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 여든이 된 ‘토지(土地)’의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아낀 말의 후면에는 어떤 생각들이 있는 걸까. 한 해가 저물고 있는 8일 오후 강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으로 찾아갔다.

우선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토지문화관 본관의 서쪽에서 진행 중인 공사였다. 작가들이 찾아와서 글을 쓸 수 있는 아담한 새 ‘창작관’을 짓고 있는 것이다. 골조가 서고, 시멘트가 부어지고 있었는데, 새가 양 날개로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작가가 5억 원을 내고, ‘지음’이라는 건축사무소가 공들여 설계한 것이란다. 공사 진행은 만화 ‘토지’를 펴낼 마로니에출판사 이상만 사장이 책임지고 있는데 마침 그가 서울에서 와 공사장을 살펴본 다음 박 씨에게 “전망이 잘 나올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 씨는 “4월에 만들어지면 ‘낙성식’을 꼭 합시다. 그동안 신세 진 분이 많은데, 이번 (팔순) 모임에 모시지 못한 분이 많아서 죄송스러워요”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세 번째 ‘토지’ 드라마가 종영하는 것을 봤고, 그를 데뷔시킨 김동리 선생의 10주기에도 나왔고, 그가 그간 담론 조성에 한몫을 한 ‘청계천 복원’이 현실이 되는 것도 직접 봤다.

그는 복원된 청계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좋아요. 공기도, 도심 온도도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숨 쉴 터가 생긴 게 아닙니까. 하지만 아쉬워요. 예산을 더 많이 들여서 주변을 천천히 정리하고, 지금보다 폭을 더 넓게 해서 원래 모습 가깝게 복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서울시가 아니라 중앙정부가 나섰어야 했는데. 어찌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시장한테 공을 뺏겨 버렸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그는 “깨끗하게 단장된 청계천변에 투명한 쇼윈도들이 끝도 없이 죽 늘어선 모습을 가끔 그려 보곤 한다. 공장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고, 거기 옷이든 신발이든, 기계든, 조명기구든 구경거리들을 멋지게 들여놓으면 여러 나라 바이어들이 찾아와서 천변도 보고, 물건도 보면서 즐거워할 게 아닌가” 하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서울 사람은 아니지만 행정 도시를 별도로 만드는 건 생각해 볼 게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래의 테마는 ‘개발’이 아니에요. 왜 거기(충남 연기) 자연을 바꾸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거기 자연 생태를 그대로 두면서도 서울을 바꿀 여러 방도가 있을 거예요. 서울의 대학들, 널찍한 국유지 얻어서 충청이나 강원 경기로 나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빈 대학 터에는 외국 수도들처럼 숲을 만들고. 그러면 사람들이 주말마다 서울 빠져나간다고 줄줄이 늘어서지 않아도 될 텐데….”

작가는 여든 살이 되어도 희망하는 게 많다. 딸네 식구들과 함께 몇 달 전 서울의 한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 마침 이날 도착했는데 이를 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외손자들 때문인 듯하다. 그는 “맏손자인 원보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내가 ‘청동 기사’라고 부른다. 판타지 소설을 다 썼는데, 삽화까지 자기가 그리려는 바람에 책이 늦어지고 있다. 문장이 좋아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가 외손자들 이야기를 할 때는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행복했다면 글을 안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고, 김동리 선생을 통해 별로 기대도 안 했던 소설로 데뷔했던 때는 혼자서 참 힘들게 살던 때였다. 생활이 거의 밑바닥이었다”고 말했다. “다 내 노력보다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지난가을에는 (토지문화관 뒤의) 오봉산 아래서 산제(山祭)를 지냈어요. 자연이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 같아요. 그게 우연하게 힘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많은 원로처럼 그가 살아온 삶도 우리 사회의 지난 어려움과 맞닿은 부분이 많다.

“이러다 내가 죽지. 그런 고비가 여러 번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꼭 (누군가) 바늘구멍만큼씩 열어 주셨어요. 그게 살아가는 데 힘이 됐어요. 그래서 희망을 안 버렸어요. 다 해결이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그게 한 해를 또 보내는 작가가 여든 해의 삶을 돌아보며 한 말―‘팔순 모임’에서 하지 않았던 그 말―인지 모른다.

■작가 박경리 씨는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5년 진주여고 졸업

△1955년 단편 ‘계산’으로 ‘현대문학’ 통해 데뷔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발표

△1969∼94년 대하소설 ‘토지’ 집필

원주=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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