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삶을 돌아보며 일흔까지만 말했다. 일흔 살이 되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일흔 살을 ‘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 여든이 된 ‘토지(土地)’의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아낀 말의 후면에는 어떤 생각들이 있는 걸까. 한 해가 저물고 있는 8일 오후 강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으로 찾아갔다.
우선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토지문화관 본관의 서쪽에서 진행 중인 공사였다. 작가들이 찾아와서 글을 쓸 수 있는 아담한 새 ‘창작관’을 짓고 있는 것이다. 골조가 서고, 시멘트가 부어지고 있었는데, 새가 양 날개로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작가가 5억 원을 내고, ‘지음’이라는 건축사무소가 공들여 설계한 것이란다. 공사 진행은 만화 ‘토지’를 펴낼 마로니에출판사 이상만 사장이 책임지고 있는데 마침 그가 서울에서 와 공사장을 살펴본 다음 박 씨에게 “전망이 잘 나올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 씨는 “4월에 만들어지면 ‘낙성식’을 꼭 합시다. 그동안 신세 진 분이 많은데, 이번 (팔순) 모임에 모시지 못한 분이 많아서 죄송스러워요”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세 번째 ‘토지’ 드라마가 종영하는 것을 봤고, 그를 데뷔시킨 김동리 선생의 10주기에도 나왔고, 그가 그간 담론 조성에 한몫을 한 ‘청계천 복원’이 현실이 되는 것도 직접 봤다.
그는 복원된 청계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좋아요. 공기도, 도심 온도도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숨 쉴 터가 생긴 게 아닙니까. 하지만 아쉬워요. 예산을 더 많이 들여서 주변을 천천히 정리하고, 지금보다 폭을 더 넓게 해서 원래 모습 가깝게 복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서울시가 아니라 중앙정부가 나섰어야 했는데. 어찌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시장한테 공을 뺏겨 버렸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그는 “깨끗하게 단장된 청계천변에 투명한 쇼윈도들이 끝도 없이 죽 늘어선 모습을 가끔 그려 보곤 한다. 공장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고, 거기 옷이든 신발이든, 기계든, 조명기구든 구경거리들을 멋지게 들여놓으면 여러 나라 바이어들이 찾아와서 천변도 보고, 물건도 보면서 즐거워할 게 아닌가” 하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서울 사람은 아니지만 행정 도시를 별도로 만드는 건 생각해 볼 게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래의 테마는 ‘개발’이 아니에요. 왜 거기(충남 연기) 자연을 바꾸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거기 자연 생태를 그대로 두면서도 서울을 바꿀 여러 방도가 있을 거예요. 서울의 대학들, 널찍한 국유지 얻어서 충청이나 강원 경기로 나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빈 대학 터에는 외국 수도들처럼 숲을 만들고. 그러면 사람들이 주말마다 서울 빠져나간다고 줄줄이 늘어서지 않아도 될 텐데….”
작가는 여든 살이 되어도 희망하는 게 많다. 딸네 식구들과 함께 몇 달 전 서울의 한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 마침 이날 도착했는데 이를 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외손자들 때문인 듯하다. 그는 “맏손자인 원보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내가 ‘청동 기사’라고 부른다. 판타지 소설을 다 썼는데, 삽화까지 자기가 그리려는 바람에 책이 늦어지고 있다. 문장이 좋아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가 외손자들 이야기를 할 때는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행복했다면 글을 안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고, 김동리 선생을 통해 별로 기대도 안 했던 소설로 데뷔했던 때는 혼자서 참 힘들게 살던 때였다. 생활이 거의 밑바닥이었다”고 말했다. “다 내 노력보다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지난가을에는 (토지문화관 뒤의) 오봉산 아래서 산제(山祭)를 지냈어요. 자연이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 같아요. 그게 우연하게 힘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많은 원로처럼 그가 살아온 삶도 우리 사회의 지난 어려움과 맞닿은 부분이 많다.
“이러다 내가 죽지. 그런 고비가 여러 번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꼭 (누군가) 바늘구멍만큼씩 열어 주셨어요. 그게 살아가는 데 힘이 됐어요. 그래서 희망을 안 버렸어요. 다 해결이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그게 한 해를 또 보내는 작가가 여든 해의 삶을 돌아보며 한 말―‘팔순 모임’에서 하지 않았던 그 말―인지 모른다.
■작가 박경리 씨는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5년 진주여고 졸업
△1955년 단편 ‘계산’으로 ‘현대문학’ 통해 데뷔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발표
△1969∼94년 대하소설 ‘토지’ 집필
원주=권기태 기자 kk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