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후계구도 논란만 해도 그렇다.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지난달 21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10월 28일) 방북했을 때 ‘김정일의 차남 김정철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김정철도 환영만찬에 참석했다”며 “이는 그가 후계자로 결정됐다는 증거”라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도 이를 비중 있게 다뤘지만 결과는 ‘사실무근’이었다. 씁쓸했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봤어도 무리한 보도였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북한의 후계 문제를 얘기하려면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이 넘어간 첫 세습과정부터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것은 길고도 비밀스러운 과정이었다. 김정일은 22세 되던 1964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당직을 시작한다. 이후 1973년 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1974년 정치위원(정치국원)을 거쳐 후계자로 자리 잡는다.
눈여겨볼 것은 그때도 북한 당국은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 중앙’이라고만 했다. 그의 이름이 공식 등장한 것은 38세 되던 1980년 10월 제6차 당 대회에서였다. 무려 16년간이나 막후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68세였다. 올해 김정일은 63세, 김정철은 24세다. 어느 모로 보나 아직은 이르다.
김정일은 권력을 거저 얻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에 진행된 김일성 1인 지배체제 확립에 기여했다. 당시 박금철 부수상, 김창봉 민족보위상 등 아버지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숙청할 때 한몫했다. 문화 예술분야를 틀어쥐고 아버지 우상화 작업도 주도했다. 세습왕조라고 해도 후계자가 되려면 최소한의 ‘업적’은 있어야 했다. 김정철도 마찬가지다. 노동당 선동선전부에서 잠시 일했다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시간이 더 필요한 이유다.
북한은 지금 사면초가(四面楚歌)다. 핵 포기 압박은 거세고, 경제는 어렵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후계구도를 가시화할 필요가 있을까. 북한 전문가들은 “1973∼85년은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었고, 1985∼94년은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이었다”고 말한다. 김일성 집권 후반기는 사실상 김정일이 통치했다는 뜻이다. 권력의 생리를 알고 이를 직접 경험한 김정일이 쉽사리 권력을 넘겨주겠는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올 한 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구호는 ‘민족끼리’와 ‘민족공조’였다.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끼리 남북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니,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민족공조’가 1993년 ‘조국통일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 1998년 ‘민족대단결 5대 방침’, 올해 신년사의 ‘3대 민족공조’로 이어져 내려온 북한의 일관된 대남 통일전술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미일이 ‘국제공조’ 한다니까 들고 나온 게 ‘민족공조’이기도 하다.
지난주 북한인권국제대회가 열렸을 때 여당의 중진 의원들은 “인권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들의 주장은 “인권 개선 요구는 우리에 대한 선전 포고”라는 북한의 주장과 놀랍게도 닮았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3일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를 ‘동지’라고 불렀다. 남쪽에서도 민주화 운동 인사들끼리는 서로를 ‘동지’라고 한다지만 그렇다고 북한 당국자에게까지 이런 호칭을 써야 했을까. 북한 대표는 이를 받아 “남북은 하나의 대가정”이라고 화답했다. ‘민족공조’의 절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김정일 후계 구도’에 관한 외신의 억측에 언론이 흥분하고, 정치인들이 주변 정세에 대한 종합적 고려 없이 아무 말이나 해대는 것은 남북관계 진전에 도움이 안 된다. 미 정부가 북한의 위조 달러를 문제 삼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한미동맹의 한 축인 우리가 북한 당국자를 ‘동지’라고 불러 무슨 소득이 있을까. 필자를 포함해 모두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실익도 없으면서 공연히 북한 편향의 인상을 줘 미국과의 관계만 불편케 하는 것도 결국은 북한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북한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다시 반성문을 쓰는 이유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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