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한승원]눈밭 속에도 보리는 자란다

  • 입력 2005년 12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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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하루 내내 눈이 퍼붓다 말다 했다. 가끔 검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로 인해 길에는 눈들이 다 녹았지만 산에는 쌓여 있다. 오전쯤에는 도착하리라고 한 택배 물품이 오질 않는 것이 눈 때문인 듯싶다. 오후 다섯 시에 입마개하고 목수건 두르고 두꺼운 모자 쓰고 등산화 신고 오리털 넣은 겉옷 걸치고… 마치 얼음나라 사람처럼 차리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눈보라가 앞을 막아선다. 금년에는 웬 눈이 이렇게 자주 많이 내리는 것일까. 몰려온 어치들이 눈보라 무릅쓰고 치자나무의 샛노란 열매들을 쪼아대고 철쭉나무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무엇인가를 먹는다. 연못의 투명한 얼음 속에 비단잉어들이 보인다. 진흙 속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다가 나온 것이다.

농로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쌩쌩 달려온 찬바람이 방한복의 틈새를 파고든다.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 살아 있는 한 추위에 대들어야 한다. 영하의 날씨라고 따스한 방 안과 서재만을 오간 까닭으로 몸이 굳어져 있다. 더위를 피하여 냉방 속에만 있으면 안 되듯이 추위가 두려워 방 안에만 있어도 안 된다. 맹추위 때문에 아침 운동을 피했으므로 오후에는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겨울철에는 가끔 찬바람을 몸과 마음에 쐬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숨이 가빠지도록 속보로 걷는다. 모든 가진 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관리하느라고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나도 육체와 정신과 우주를 소유한 만큼 당연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

논둑의 풀과 농수로의 갈대들은 다 황갈색이 되었지만, 논의 보리나 밭의 마늘과 양파들은 흰 눈 속에서 암녹색 얼굴을 내밀고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어요!” 하고 소리친다. 그렇다. 겨울을 잘 보내야 한다. 겨울은 그냥 쉬는 계절이 아니고 준비하는 계절이다. 겨울을 멍청하게 쉬기만 하면 다음 해 봄이 황급해진다. 겨울 찬바람 속에서 몸을 단련하지 않은 운동선수들은 다음 해에 연전연패한다. 겨울 방학 때에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의 영혼은 건조하고 삭막해진다. 겨울에 봄을 준비하지 않은 나무들은 다음 해 봄에 건전하게 싹틀 수 없다.

먹황새 한 마리가 얕은 물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 갈매기 한 마리가 어디론가 날아간다. “허연 성에가 둥둥 떠다니는 물속에 맨손 넣고 김을 뜯었더니라.” 아침밥을 먹으러 내려갔더니, 91세의 노모가 흐린 눈으로 창밖의 눈발을 내다보면서 젊은 시절에 혹한 속에서 고달프게 김 양식하여 살림 일으켰던 이야기를 했다. 잘살아 가고 있는 사람치고 젊은 시절에 신산의 삶 살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토굴 뒷산 너머로 달려가는 먹장구름들 속에서 우르릉 우르르 천둥소리가 난다. 아차, 컴퓨터 전원을 뽑고 나올 것을 그랬다. 지난여름 장마철 뇌성벽력으로 컴퓨터를 망쳐 본 나는 조급해져서 걸음을 재촉한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서라, 설마 겨울철 천둥이 내 컴퓨터를 망가지게 하랴” 하고 나를 꾸짖으면서 풋늙은이의 천천한 걸음으로 바꾼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은 건강한 몸 만들기에도 철저하게 적용된다.

한승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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