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반병희]수능 치른 조카에게

  • 입력 2005년 12월 20일 03시 09분


조카 S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발표됐다.

오전 2, 3시에 귀가해 발조차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잠들어야 했던 3년이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허겁지겁 뛰쳐나가 스쿨버스를 타야 했던 조바심도 이제는 바람에 날려 보내도 되리라.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구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상심하는 모습에 그동안 시골의 부모님 대신 너를 맡았던 내 마음도 무겁다. 하물며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시험을 치르고 싶다’는 너의 심정은 오죽하랴. “잘 본 아이들 역시 나름대로 아쉬움과 회한이 있을 것”이라는 말로 위로하기엔 네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운 듯하다.

그렇지만 S야.

젊음이 아름다운 것은 오늘의 아픔을 미래의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자산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선인장을 보아라.

아주 오랜 옛날에는 선인장도 다른 나무들처럼 아름다운 잎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각 변동과 기후 변화로 생겨난 사막 한복판에 뚝 떨어지게 된 선인장은 재빨리 잎을 가시로 바꾸어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다. 수분이 부족한 사막에서 잎의 크기를 최소화해 물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양분을 만드는 일도 잎에서 줄기로 바꿨다. 감질날 정도로 비가 적게 내리는 짧은 우기 때는 줄기 속에 온전히 물을 받아 놓았다가 건기가 닥치면 이를 사용해 생명을 유지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을 수 있었다.

암담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모양을 바꾸고 몸의 기능을 조정해 새롭게 사는 방법을 찾은 덕분이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옛 모습을 고집한 많은 식물이 멸종해 갔음은 물론이다.

올해 여름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애플사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의 고단했던 삶이 생각난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양부모 아래에서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했다.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회사(애플)에서 축출됐다가 암으로 시한부 삶의 선고까지 받아야 했던 그의 굴곡진 역정(歷程)에 너는 “시련이 성공을 이끌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는 세상이라는 사막에 던져진 ‘선인장’이었다. 고통의 시간을 오히려 실력을 쌓는 계기로 삼았다. 대학을 다니지 못하게 되자 친구 집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고 콜라 병을 모아 먹을 것을 샀다. 그 와중에도 대학 청강만큼은 계속해 마침내 컴퓨터 프로그램에 혁명을 몰고 온 매킨토시 글꼴을 개발하게 됐다.

S야, 젊음에 도전이 없다는 것은 영혼에 무지개가 없는 것과 같다. 초중고교 시절 성적 부진으로 여러 차례 공개적 망신을 당했던 윈스턴 처칠은 ‘세계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도전욕이 있었기에 주변의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해 삼수까지 했다. 그에게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었다.

S야, 갈증이 길고 심한 만큼 선인장이 피워내는 꽃은 더욱 화려하단다. 지금은 비가 오지 않지만 참고 씨를 뿌리면 반드시 비는 온다. 오늘의 고통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인생의 수많은 고비 중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어려운 때일수록 밝게 웃던 너의 모습을 곧 다시 보기를 기대한다.

반병희 사회부 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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