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北출신 여배우 리경, 영화 ‘태풍’ 곽경택 감독 만나다

  • 입력 2005년 12월 21일 03시 02분


영화 ‘태풍’을 놓고 대화를 나눈 곽경택 감독(오른쪽)과 탈북자 출신 여배우 리경. 평안남도 출신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난 곽 감독과 함경북도 출신인 리경의 몸에는 모두 ‘북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권주훈  기자  kjh@donga.com
영화 ‘태풍’을 놓고 대화를 나눈 곽경택 감독(오른쪽)과 탈북자 출신 여배우 리경. 평안남도 출신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난 곽 감독과 함경북도 출신인 리경의 몸에는 모두 ‘북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권주훈 기자 kjh@donga.com
《영화 ‘태풍’이 전국에 태풍을 일으켰다. ‘태풍’의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14일 개봉된 이 영화는 18일까지 전국 18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는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의 개봉 첫 주 최고 흥행기록(관객 177만 명)을 넘어서는 수치. 남한에 외면당한 탈북자 ‘씬’(장동건)이 해적으로 변신해 한반도를 향한 테러를 도모한다는 내용의 영화 ‘태풍’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곽경택(39) 감독, 이 영화를 보며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는 탈북자 출신 여배우 리경(21)이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리경=영화를 보면서 계속 감정이 북받쳤어요. 그리운 고향(함경도) 사투리가 내내 들렸고, ‘씬’의 누나 명주(이미연)는 내 처지와 너무 비슷했거든요. 저도 남동생을 안고 엉엉 울면서 중국 공안(경찰)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있으니까요. 특히 명주가 배고픈 동생에게 만두를 구해 주기 위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선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곽경택=많은 탈북자를 인터뷰했어요. 영화보다 훨씬 더 처절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다 넣진 못했습니다. 액션과 스케일을 버무린 큰 영화로 만들다 보니 겪는 한계였죠. 아직까지도 국내 관객들은 탈북자들의 어둡고 속상한 이야기를 불편해 해요.

(‘대한민국’ 국적의 곽 감독과 리경의 혈관에는 ‘북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곽 감독의 아버지는 평안남도 출신의 월남자. 함경북도 출신인 리경은 북한 전직 고위층의 딸로 태어났다.)

▽리=중국에서 만난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탈북자들에게 돈을 찔러주면서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 한 번 해 보라”며 재미 삼아 채근을 해요. 그래서 저도 ‘씬’의 심정이 이해돼요. 특히 그가 배를 타고 메콩 강을 건너는 모습에선 울컥했어요. 저도 목숨을 걸고 메콩 강을 건너 태국으로 넘어갔으니까요. ▽곽=‘씬’은 자신을 잡으러 온 남한의 강세종(이정재)에게 “동무, ×같은 사실이 뭔지 알지비…. 자네하고 나하고는 말이 통한다는 사실임메” 하고 소리치죠. 이 대사는 내가 ‘태풍’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대사였어요. 배우 장동건에게도 이 대사를 들려 주니 울컥하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리=‘씬’처럼 저도 함경도 출신입니다. 함경도 사람들은 딱 부러진 성격이죠. 거친 데다가 마음먹은 건 일단 저지르지만 속정이 참 많아요. 어머니도 풍족한 형편은 아니어도 늘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을 퍼 주곤 했어요.

▽곽=함경도 사람들은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해요. 요즘엔 그곳 사투리도 많이 변하고 있다고 해요. 중앙에서 유배된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나다 보니 말이 섞여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죠. ▽리=중국말을 모르는 부모님은 벙어리 시늉을 해 가며 중국에서 살아남았어요. 저는 몇 년을 죽도록 농사일을 해 가며 연명했고요. 지금은 편안한 삶을 살지만 불안감은 씻기지 않아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과연 누가 우리 가족을 지켜줄까?’ 하는…. 근데 가끔은 “남한도 사느라 바쁜데 왜 넘어왔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어요.

▽곽=그런 바보 같은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어요. 평안도 출신의 제 아버지는 평생 의사로 살아오면서도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버리지 못하셨어요. 내가 고등학교 때 일이에요. “아버지처럼 의대에 가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잘 생각했어. 전쟁이 나도 군인들이 의사는 잘 안 죽이는 법이니…”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북한을 떠나온 분들은 마음속에 응어리진 뭔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대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리경은 “중국의 지하 단칸방에서 가족과 함께 추위에 떨면서 영화 속 ‘씬’처럼 ‘남한의 친구들에게’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편지를 써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절절한 심정으로 쓴 ‘우리 가족도 분단 역사 50년의 또 다른 희생자입니다. 우리를 꼭 받아주세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말을 들은 곽 감독은 리경에게 “이젠 영화학도로 성공하길 바란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꼭 북한에 스튜디오를 짓고 통일 과정에 얽힌 우여곡절을 담은 대형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곽경택 감독

△1966년 부산 출생

△1986년 고신대 의대 입학, 중퇴

△1995년 뉴욕대(NYU) 영화연출과 졸업

△1997년 ‘억수탕’으로 감독 데뷔

△2001년 ‘친구’ 연출

△2005년 ‘태풍’ 연출

● 리경

△1984년 함경북도 출생

△1998년 가족과 함께 탈북

△2002년 한국에 입국

△2004년 동국대 영화과 입학

△2005년 2월 SBS 설날 특집극 ‘핑구 어리’로 데뷔

▼주연배우 장동건에 대해…▼

영화 ‘태풍’에서 탈북자 ‘씬’ 역을 맡은 장동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곽경택 감독과 리경은 모처럼 무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곽 감독은 “방송 등에서 북한 사람 역을 맡은 배우들이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사투리가 모두 섞인 국적불명의 사투리를 구사할 때는 방송작가들이 한심스럽게 보이기도 했다”며 “극중 장동건이 쓴 함경도 사투리는 20여 년 전 함경도에서 쓰던 사투리에 가장 가깝다”고 말했다.

최근 SBS TV 미니시리즈 ‘사랑은 기적이 필요해’에서 탈북자 출신 내레이터 모델 ‘미미’ 역을 맡았던 리경은 “지금도 어머니와 ‘모국어’로 전화 통화를 하면 주위에서 ‘엄마와 싸웠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함경도 사투리는 드세고 고치기도 어렵다”면서 “그 잘생긴 장동건 씨가 함경도 말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했다.

“근데 장동건 씨가 갑자기 금니를 드러내면서 얼굴에 이런저런 상처를 보여 주니 ‘참으로 매력적인 해적도 있구나’ 하고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죠.(웃음) 장동건 씨가 탈북자로 출연한 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역대 가장 매력적인 탈북자라는 점에서요. 그동안 남자 탈북자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왜소하게 다뤄지곤 했거든요. 아닙니다. 아무리 ‘남남북녀’라고 하지만, 북한 남자들이 얼마나 잘 생기고 부(富)하게 생겼는데요.(웃음)”

곽 감독은 “장동건이 너무 잘생긴 게 탈이라 솔직히 ‘씬’ 역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다”면서 “얼굴에 상처도 나고 살도 확 빠진 모습으로 초지일관 증오에 불타면서 ‘동무, 사람고기 먹어본 적 있슴메’ 할 때는 나도 섬뜩한 느낌이 들더라”고 말했다.

▼‘태풍’ 드림웍스社 통해 美 배급하기로▼

영화 ‘태풍’의 국내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는 20일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인 ‘드림웍스’와 지난 주 ‘태풍’의 미국 배급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태풍’의 미국 배급은 메이저 배급사가 자신들이 투자하지 않았던 한국 영화를 ‘완성된 상품’으로 보고 나서 배급을 결정한 첫 케이스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 ‘태풍’을 연출한 곽경택 감독이 내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드림웍스와 함께 구체적인 개봉 극장 규모와 시기, 수익 배분 비율 등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CJ엔터테인먼트는 덧붙였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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