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비록 먼 옛날이긴 하지만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유럽에 건너가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였다. 객지에서 맞는 명절이란 한결 외롭고 쓸쓸한 법이다. 당시 내가 입학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선 바로 그처럼 오갈 데 없는 명절의 객지 학생들을 위해 그들을 초대해 주는 독일 가정의 주소 카드를 한 상자 가득히 마련해 두고 있었다.
독일에 건너온 지 두 달도 채 안 된 나도 성탄절에 찾아갈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주선해 주는 대로 하이델베르크 근교에 한 가정의 초대를 받아 갔다. 30대 중반으로 시청에서 근무한다는 기술자 퀴터스 씨의 댁. 아직 유치원도 못 가는 어린 두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인은 수를 놓는 것이 일거리인 그 집에서 슈피낫(소형 클라브생)과 블로크플뢰테(독일의 퉁소)를 처음으로 구경했다. 그 위에 “O MUSICA!”로 시작되는 라틴어 가사를 수놓은 벽걸이가 음전해 보였다.
나는 퀴터스 부부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전하고 많은 선물을 받았다. 한창 술을 좋아하던 나이지만 비싸서 양껏 마시지 못한 포도주를 푸짐한 크리스마스 만찬과 함께 실컷 마신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이웃집에 혼자 사는 치과 의사 테터스 부인이 놀러와 합류했다. 쉬운 악보를 꺼내 퀴터스 부인과 내가 하이든 혹은 슈베르트의 네 손으로 치는 피아노곡을 슈피낫으로 연탄하면 퀴터스 씨는 같은 곡을 독일 퉁소로 따라 불곤 했다. 그러다 이윽고 밤 열두 시가 되자 퀴터스 씨 부부는 양쪽에서 내 팔을 끼고 눈길을 더듬어 동네 교회로 가서 성탄절 예배에 참여했다. 나를 환대해 준 젊은 부부는 나보다도 더 수줍어하며 조금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침실을 손님에게 내준 그 집은 한 25평쯤 되었을까, 큰 집이 아니었다.
다음 날 테터스 부인이 나를 “꾸어 달라”며 데려갔다. 외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외롭게 사는 이 과수는 훈훈한 점심과 함께 뜻밖의 선물을 내게 주었다. 앞으로 일요일마다 점심에 초대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테터스 부인의 일요 주례 오찬에 초대 받아 포도주 마시는 법도도 배우고 자그마한 슈피낫이 아닌 큰 피아노로 네 손으로 치는 여러 곡을 합주도 하면서 유학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45년 전의 아련히 먼 옛날 일이다.
1960년 당시에도 물론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독 일반 시민의 생활은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만 해도 서독의 모든 담배는 한 갑에 열 개비씩 들어 있었고 아직 한 갑에 세 개비가 든 담배도 팔고 있었다. 스무 개비짜리 미제 담배가 수입되기 시작한 1960년대 말엔 그 때문에 담배 자판기를 뜯어고쳐야만 했던 것을 우리는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3의 경제기적’이라 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우리들의 소비생활은 어떤 면에선 예전의 서독, 오늘의 통일 독일보다 훨씬 풍요롭다 해도 과장이 아닐 줄 안다. 1970년대까지 독일에 노동력을 수출했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거꾸로 노동력을 수입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수는 독일의 옛 ‘가스트아르바이터(외국 노동자)’에 비할 것은 못 된다.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 유학생도 독일에서 공부하는 외국 학생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이다. 그처럼 아주 많지도 않은 외국 노동자, 전혀 많지가 않은 외국 유학생이 한국의 객지에서 맞는 성탄의 명절을, 그리고 또 곧 맞게 될 새해 설날의 명절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그들에게도 원한다면 한국의 가정에서 명절을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초청 주소록 같은 것을 만드는 학교기관이나 시민 단체는 없는지….
징글벨 소리를 들으며 젊은 날을 추억하다 보니 나도 내년에는 우리 곁에 와 있는 외국의 젊은이를 초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최정호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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