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형사립고(자사고)는 정부 예산에서 단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자사고를 선택한 학생들은 수업료를 평준화 학교의 3배 정도 낸다. 그러나 수업료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상산고가 자사고로 전환한 후 홍 이사장이 내놓은 사재는 300억 원에 이른다. 자사고를 지원할 정부 예산이 평준화 학교로 가기 때문에 그만큼 공교육의 건실화에도 기여하는 셈이다.
상산고 학생들은 입학 당시보다 2, 3학년 때 성적이 월등하게 향상됐음이 전국 모의고사 등에서 확인됐다. 우수한 학생들이 경쟁해 학업 분위기가 좋고 교사와 시설 등 교육 여건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민족사관고는 2006학년도 입시에서 놀라운 성적을 냈다. 민사고 국제반 학생 47명 가운데 18명이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스탠퍼드대 코넬대 듀크대 시카고대 등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다.
공교육의 질이 떨어져 여유 계층에서는 자녀를 중고교 때부터 미국 사립학교에 보내는 학부모가 많다. 미국 사립학교는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합해 1년 학비가 4만∼5만 달러 든다. 조기 유학 붐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까먹는 것이다. 두 자사고의 성공은 해외로 빠져나가는 고급 교육 수요를 국내에서 충족시켜 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자립형사립고제도협의회(위원장 김신일 서울대 교수)의 확대 건의를 받고서도 미적거리던 교육인적자원부가 자사고 확대 방침을 어제 공식 발표했다. 김진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종교계 지도자를 만난 자리에서 “자사고를 현행 6개에서 20개 정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반대하는 것이 걸림돌이다. 그러나 전교조도 평준화의 큰 틀을 깨지 않으면서 공교육에 더 많은 재정이 돌아가도록 하는 제도에 끝까지 반대하기에는 명분이 약하다.
정부 재정이 열악할 때 공교육을 상당 부분 사립학교에 의존해 사학의 비율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 전국 931개 사립고등학교 전체를 일거에 평준화 제도의 밖으로 내보내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재정이나 교육 여건에서 준비가 안 된 학교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평가를 거쳐 자립할 실력을 갖춘 학교부터 자사고로 전환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02년 서울에서 19개교가 자사고를 희망했지만 유인종 전 서울시교육감이 반대해 서울에는 단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공정택 교육감은 서울의 강북 쪽에 자사고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도 강남·북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강북지역 자사고 설립을 지원하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서울에서 자사고로 갈 의지와 여건을 갖춘 학교로는 중앙고 이화여고 중동고 등이 꼽힌다.
자사고가 늘어나면 사학의 체질 개선도 기대된다. 경쟁 체제가 도입되면 사학들은 학생을 배정받고 재정을 지원받는 데 안주(安住)하지 않고 투명한 경영과 교육의 질 개선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을 받으려고 더 노력할 것이다.
자사고가 성공할 기반을 닦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 수업료의 상한선을 없애고 대학입시에서 내신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해야 이 제도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자립형사립고제도협의회의 결론이다.
홍 이사장은 “학생을 배정받다가 건학 이념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게 되니 신이 나서 돈을 써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사학 경영인들을 법으로 옭아맬 것이 아니라 신바람 나게 해 주는 것이 한국 교육의 세계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해법(解法)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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