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키산업신용조합은 유 회장이 일본 금융권에서 여전히 차별받는 재일교포들의 자금 숨통을 틔우기 위해 곽 회장 등과 함께 뜻을 모아 설립한 것으로, 오사카 시를 순환하는 JR선 쓰루하시(鶴橋)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역 출구부터 죽 늘어선 불고기집들이 ‘코리안 타운’임을 말해 주는 동네다.
1층에서 비서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백발의 안내원이 벌떡 일어나 “6층에서 내리라”고 3번 이야기한 뒤 3번 머리를 숙였다. 6층에 닿자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마중 나온 여비서가 허리를 굽혔다. 더도 덜도 어색할 것 같은, 딱 그만큼의 공손함이었다. 잠시 후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유 회장에게 맨 먼저 MK택시의 상징인 친절이 무엇인지부터 물어봤다.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친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인사입니다.”
―인사란 무엇입니까.
“인간성이자 인간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MK택시 운전사들에게 인사를 가르치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MK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적지는 ○○까지시네요.’ ‘오늘은 ○○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으십니까.’
유 회장은 1976년 이 네 가지 인사를 빼먹으면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 택시업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택시는 무뚝뚝함과 뻣뻣함의 대명사였다.
현재 일본 신용조합업계에서 최대 수익을 자랑하는 긴키산업신용조합의 최대 영업자산도 인사다.
“매일 오전 8시 20분이 되면 조합의 전 직원이 거리에 나가 시민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며 예금을 맡기는 일본인이 부지기수입니다. 대출 고객은 90% 이상이 교포지만 예금 고객은 60% 이상이 일본인입니다.”
유 회장은 하다못해 길을 묻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도 ‘우리 고객’이라고 직원들에게 늘 강조한다.
그러나 유 회장이 ‘굽히기만 잘하는’ 경영자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 회장은 규제 압력 회유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택시 요금 인하를 막는 교통행정 당국과 경쟁업체를 10여 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굴복시켰다.
‘관료 왕국’, 더구나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이런 무모함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는 왜 이런 고집을 부렸을까.
“나의 경쟁 상대는 늘 ‘마이카’였습니다. 택시가 아니었습니다. 마이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들이 부담 없이 탈 수 있는 수준으로 가격을 낮추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리고 마이카보다 더 편리하고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이카에 밀려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 회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한일 갈등에 관한 해법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제시했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역사 왜곡 등은 모두 일본의 국력이 우리보다 앞서 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인은 누가 자신을 뛰어넘으려 할 때는 가차 없이 짓밟지만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되면 금방 포기하고 배우려 합니다. 일본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만이 한일 갈등을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질소(質素)함과 근면 등 일본인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면서 2배, 3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유 회장은 민족대학인 고려대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활발한 연구 활동과 의식개혁 운동이 일어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곽 회장과 의기투합해 20억 원을 쾌척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국민이 뜻을 모은다면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지역 주민들을 모시고 MK택시에 와서 친절 연수에 땀을 흘리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에서 그 싹을 본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내내 동석하고 있던 유 회장의 동생 유태식(兪台植·69) 긴키산업신용조합 부이사장이 1층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기자가 눈에 안 보일 때까지 마냥 그대로 서 있을 것 같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인사를 차릴 길이 없었다. 형제는 친절했다.
오사카=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 유봉식 회장은
△1928년 경남 남해 출생
△1943년 빈손으로 일본행
△1960년 교토에서 미나미택시 설립
△1963년 가쓰라택시 인수
△1977년 미나미택시와 가쓰라택시 합병 후 MK로 사명 변경
△2001년 긴키산업신용조합 회장
■ 경영 노하우
유봉식 회장의 이 같은 지론은 오늘의 MK택시가 있게 한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경쟁업체를 몇 발짝씩 앞질러 온 서비스 혁신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1960년 유 회장이 택시 10대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최대의 골칫거리는 운전사들의 무단결근, 지각, 조퇴였다. 운전사들이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 회장은 1969년 한 부동산 업체가 내놓은 집 46채를 모두 사들여 싼 가격에 사원들에게 내놓았다. 18년간 월 3만4000엔씩 달돈(월부금)을 내면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신청자는 전혀 없었다. 당시 택시 운전사의 월급이 7만 엔에 불과해 달돈을 내고 나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 이래서는 ‘마이카’와 경쟁할 만큼 친절한 운전사를 키워 내기 어렵다고 유 회장은 판단했다.
유 회장은 당시 은행 지점장에 필적하는 12만 엔 수준으로 운전사들의 월급을 전격 인상했다. 물론 수지가 맞을 리 없었다. 주위에서는 몇 달 안에 망할 것이라는 말이 무성했다.
그는 매출액 증대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택시는 손님이 타건 안 타건 드는 비용이 일정하기 때문에 매출액을 늘리면 수익이 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유 회장은 단거리라도 고객이 손을 들면 반드시 태우라고 운전사들에게 호소했다.
또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전사의 자택에 차고를 두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교통 당국이 제재를 걸고 나섰지만 1년간 싸운 끝에 마침내 허가를 얻어냈다. 유 회장은 “고객에게 친절하기 위해 운전사들을 잘 대우해 주는 것이 요체였다”며 “서비스 혁신 아이디어는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오사카=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MK택시의 서비스혁신 발자취▼
△1971년 자택 교대제 실시 △1972년 장애인 우선승차제 실시 △1973년 ‘움직이는 정보백화점’ 실시 △1975년 학사 운전사 채용 △1976년 네 가지 인사하기 운동 실시 △1978년 구급택시 발족 △1982년 운임 인하 신청 △1983년 고급디자인 제복 착용 △1985년 영어회화 택시 운행 △1990년 교토역에 MK귀빈실 개설 △1992년 전 차량 금연 실시 △1994년 요금 인하 허가서 받음 △2001년 GPS 무선자동배차시스템 도입 △2003년 기모노 할인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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