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안 보일 정도의 폭설. 하지만 그는 “홋카이도에서 이 정도는 보통”이라며 태연히 차를 몰았다.
“지금까지 100번쯤 이 길을 달렸나 봅니다. 진정한 민족의 화해와 동아시아 공동체 탄생은 언제쯤이나 가능할는지….”
“가혹한 노동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조선인들이 가장 위험한 작업을 자원했다는 말도 전해 옵니다.”
그는 댐을 관리하는 홋카이도전력이나 일본 정부가 희생자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을 비판했다. 당시 댐 건설비를 댔던 제지회사로 현재도 활동을 하고 있는 오지(王子)제지회사 역시 그런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부끄러운 역사를 은폐할 것이 아니라, 파헤침으로써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데 최근 일본 사회 흐름은 반대인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차에서 내려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댐 부근의 순직 위령비를 찾아갔다.
“자발적으로 일하다 숨지는 게 순직이지, 각종 형태의 징용 혹은 꾐에 빠져 혹사당하다 숨진 이들한테는 맞는 말이 아니지요.”
스포츠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1987년 이 지역 민간단체가 주도한 유골 발굴 작업 보고서를 접하고 역사문제에 눈을 떴다. 이후 학생들을 인솔해 유골 발굴 작업에 참가하고 1991년 추모 동상 건립에도 적극 관여했다. 한일 학생 워크숍도 주최했다.
몇 년 전에는 어린 딸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사는 경기 광주시의 ‘나눔의 집’을 찾아가 가슴으로 사죄했다. 2000년 이후 대학 측의 적극적 지원과 동료 교수들의 협조로 평화 인권 역사를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을 4번 열었다. 댐 옆에는 신원 불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는 기념관이 있다. 1997년에 생긴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은 마을 주민인 다나카 후지오(田中富士雄·65) 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예전에는 절이었기에 아직 한반도 출신 희생자의 위패가 남아 있다. 당시 지방지에 실렸던 조선인 노동자 사망 기사도 전시돼 있다.
“절이 생긴 게 1934년인데 공사 때는 매일같이 시신이 운반돼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가혹한 상태에서 강행된 공사였다. 스즈키 교수의 ‘역사 발굴’에 반대하는 마을 사람도 많았다. 80가구의 궁벽한 산골 주민들은 호수를 관광지로 삼고 싶어 하는데 자꾸 ‘유골’ ‘징용’을 들먹이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화를 맹세하는 일본 최북단 마을’을 만들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그의 설득에 젊은 층이 적극 호응하고 나섰고 1997년과 2002년에 이어 내년에도 역사의 진실을 찾는 유해 발굴 작업은 계속된다.
“같은 또래 청년들이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유명인의 강의보다 효과적이라고 믿어 평화 심포지엄을 열게 되었습니다. 한일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 후손의 미래를 위해 동아시아 공동체에 눈을 돌려야 할 시기입니다.”
전교생 700명의 일본 최북단 대학 나요로대. 스즈키 교수를 비롯한 이 대학 교수들은 내년 2월 개최할 제5회 국제 심포지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런 스즈키 교수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고교 2학년인 외동딸이 내년 삿포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공부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한국의 대학에 가면 영어도, 한글도 배우고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인데 말을 듣지 않아요. 어때요? ‘강제연행’이라도 해서 데려가 주실래요?”
한(恨) 서린 용어를 쓴 탓에 얼핏 실례되는 농담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그가 자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대를 이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일 청년들이 워크숍을 마친 뒤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곤 합니다.”
동토에서 희망의 싹을 키워내고 있는 스즈키 교수의 도전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홋카이도=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스즈키 후미아키 교수는
△1956년 아이치(愛知) 현 출생
△1982년 주쿄(中京)대 체육학부 석사(스포츠사회학 전공)
△1984년 홋카이도 다쿠쇼쿠대 전임강사. 1987년부터 징용희생자 관련 활동 시작
△1997년 한일 학생공동워크숍 개최, 수차례 유골 발굴 작업 참가
△2000년 ‘평화 인권 역사를 생각하는 국제 심포지엄’ 첫 개최
△2006년 제6회 ‘평화 인권 역사를 생각하는 국제 심포지엄’ 개최 예정
△현재 코리아 NGO센터 전문위원
■ 사사노보효 전시관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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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옆의 전시관에 붙여진 이름 ‘사사노보효’는 ‘대숲 속의 묘지 표시’란 뜻이다.
공사 중 숨진 징용자 등은 주로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고 간단한 인적 사항이 적힌 나무 표지가 세워졌다. 세월이 지나며 묘표는 썩어 사라지고 묘지는 대나무 숲으로 변했다. 뒤늦게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유골이 속속 발견되었기에 이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다나카 후지오 관장은 “지난달에도 유골이 한 구 발굴되었으나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누구인지 알아낼 길이 없다. 사망자 명부가 남아 있는 유족과 연락해 유전자(DNA) 채취를 한 다음 비교분석하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비용과 시간면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이 전시관은 유골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는 고켄(光顯)사라는 절이었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절을 유지하기 힘들어져 문을 닫을까 하던 때에 기념관 이야기가 나왔고 1997년 이후 3세손인 다나카 씨가 관장을 맡아 관리해 오고 있다.
겨울철에는 ‘눈과의 전쟁’을 벌인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건물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하다. 다나카 관장은 혼자서 수m나 쌓인 지붕 위의 눈을 치우는 고된 일을 해 왔다. 수년 전부터는 스즈키 교수와 학생들이 일을 거들고 있다. 이 기념관은 그간 한일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토론하고 숙박을 하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다나카 씨는 신원 불명의 유골과 한국 이름이 새겨진 위패를 보여주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이야 걱정 없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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