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황 교수에게 쏟아졌던 열렬한 애정은 남녀 간의 열정적 사랑을 많이 닮았다. 사람을 눈멀게 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영국 런던대의 앤드리어스 바텔스 교수팀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분석해 사랑이 비판적 사고를 멈추게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팀이 뇌 사진을 조작한 게 아니라면, 연애 중인 사람의 뇌에서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라는 신경호르몬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 부분엔 뇌의 보상 시스템이 있어서 자극을 받으면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는 게 특징이다.
문제는 뇌의 이런 작용이 상대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평가, 냉정한 판단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제정신인 사람이 보기엔 문제가 있는데도 본인에게는 어떤 반대도 귀에 안 들어온다.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무모함도 여기서 비롯된다.
사랑에 눈먼 사람들 사이에서 황 교수에 대한 비판은 일종의 금기였다. 모처럼 등장한 걸출한 영웅이자 대한민국의 꿈과 성취를 상징한 황 교수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 “어느 나라 사람이냐”며 애국심을 의심받았다. 바텔스 교수가 우리 뇌를 안 찍어서 그렇지, 찍어 봤다면 비판적 사고를 하는 부분은 틀림없이 정지돼 있었을 거다. 그는 엄마들의 뇌를 자녀의 사진만 보게 하고 찍었는데도 연애 중인 사람과 똑같이 움직였다고 했다.
남녀 간이든, 모자간이든, 영웅이나 나라에 대한 사랑이든 그 사랑은 자연발생적 감정이라기보다 자신의 바람과 의도, 믿음을 깔고 있는 마음 상태이기 쉽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해득실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조건 없는 사랑이라 주장해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조상이 갑자기 두뇌가 커지는 진화를 이룩한 것은 집단생활로 두뇌파워가 요구됐기 때문이라고 진화론자들은 봤다. 꼭 정치인이 아니어도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나, 나를 어떻게 보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유독 발달한 사람도 있다. 나의 맹목적 사랑을 상대측에서 이용하는 것도 슬프지만 가능하다.
브레이크 없는 사랑에 의식적인 ‘멈춤’이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뇌의 특정 부분이 아무리 열심히 작동한다 해도 내면에서 의심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혼을 서두르는 청춘 남녀에게 현명한 어른들이 “아니다 싶으면 아닌 거다”고 조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사랑할 때는 분명히 있는 문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지만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면 안다. 그 문제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님을 깨달았을 때 끝낼 수 있어 차라리 낫다.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이나 국가와 민족에 대한 투철한 애국애족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내 맘대로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해서 해결될 일은 없다. 누구나 사랑에 쉽게 눈멀 수 있다는 약점부터 인정하면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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