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줄기세포에 희망의 싹을

  • 입력 2005년 12월 31일 03시 00분


‘황우석 신화(神話)’가 무너졌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분노와 허탈감 속에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역시 기업이다. 기업만이 구멍 난 국민의 가슴을 희망으로 채울 수가 있다.

황 교수 개인은 물론 국가나 서울대 모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설령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의 원천 기술이 있는 것으로 최종 판명이 난다고 해도 다시 나서기는 어렵다. 서울대병원에 있는 ‘세계줄기세포허브’도 소아혈액종양 치료시설로 바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업이 나서야 한다. 실패의 교훈과 기만의 대가(代價)는 국가와 황 교수 개인이 떠안고, 기업은 다시 가능성의 문을 열어야 한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건져내 살려야 한다.

처음부터 기업이 나섰더라면 이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과가 미심쩍은 연구가 4년 가까이 계속됐고, 그 과정에서 거짓과 부풀리기가 자행됐는데도 눈치 채지 못했을 기업은 없다. 그런 기업은 시장(市場)이 용납하지 않는다.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다. 이것이 국가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시장의 기능이다. 정부는 황 교수에게 국가 요인에 준하는 경호까지 해 줄 정도로 총체적인 지원을 했지만 성과 검증에는 눈뜬장님인 셈이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생명공학기술(BT)을 미래의 성장산업으로 보고 착실히 준비해 온 많은 기업이 있다. 1999년 국내 최초로 신약(선프라) 개발에 성공한 SK만 하더라도 2001년 “앞으로 10년 안에 정보기술(IT) 시대가 끝나면 다음은 BT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판단하고 매년 1000억∼2000억 원을 이 분야에 투자해 왔다고 한다.

LG, 삼성, CJ, 한솔, 동부, 코오롱, 금호, 효성 등도 다르지 않다. 삼성은 2001년 이건희 회장이 “5년, 10년 뒤에도 먹고살 수 있는 신수종 사업을 발굴하라”고 지시한 이래 BT를 장기 전략사업의 하나로 선택하고 질병 진단 및 예방용 DNA칩과 원료의약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암(癌) 치료약 개발은 고(故) 이병철 회장의 유지(遺志)라고 한다.

이들 중 어느 기업이라도 황 교수팀의 연구를 이어받아야 한다. 모두 그만한 돈과 기술과 열의가 있는 기업들이다. 삼성은 삼성전자 하나만으로도 지난해 100억 달러(약 10조 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중 1%만 여기에 쏟아 부어도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기업들이 이런 각오와 자세로 딱 10년만 줄기세포 연구에 매달려 보면 어떨까. 분명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하청 조립업체로 출발해 30년 만에 가전(家電)과 반도체를 잡고 디지털 최강국이 된 우리다. 한국 기업들의 근성과 승부사 기질을 우리는 믿는다.

황 교수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그 팀이 보유한 복제기술까지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복제 분야에서 한국이 선두주자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황 교수는 상징적 존재였을 뿐, 그 말고도 성체, 배아줄기세포 전문가는 많다. 30∼40명에 이르는 황 교수팀의 연구원들만 해도 그렇다. 이들 모두 쉽게 얻기 어려운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 죗값은 황 교수 혼자 치러도 충분하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라면 지금이 적기(適期)다. 이처럼 잘 훈련된 복제기술 인력을 어디서 쉽게 구하겠는가. 고액 연봉을 제시하고 스카우트라도 해야 될 판이다. 어쩌면 그들의 좌절과 실패가 시행착오를 줄여줌으로써 기업에는 더 유익한 자산(資産)이 될지도 모른다.

기대가 컸기에 실망감도 클 것이다. 그렇다고 연 300조 원으로 추정되는 줄기세포 시장조차 버릴 수는 없다. 아니, 그보다도 줄기세포에서 희망의 싹이 돋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 1억2000여만 명의 난치병 환자와 장애인들의 간절한 기구(祈求)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은 지난해 9월 22일 동아일보 주선으로 가진 황 교수와의 특별대담에서 “지금 젊은이들은 성공한 역할 모델을 갖고 자라난 세대로, 90% 이상이 미래를 걸어볼 만한 인재”라면서 “예전에는 실패하면 얘기해 줄 선배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 지금이 얘기해 줄 때다. 꿈은 계속된다고, 우리 기업들도 나서겠다고…. 그 한마디가 새해 첫 아침, 어떤 선물보다도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것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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