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고향에 성당짓는 데 11억 쾌척 이성규 신부

  • 입력 2006년 1월 7일 04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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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중학생은 성당을 가기 위해 8km를 걸어가야 했다. 그는 집 가까운 곳에 성당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향에 성당을 세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제의 길을 걸은 그는 지난달 현금 10억 원과 1억5000만 원 상당의 땅을 천주교 광주대교구에 기증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까까머리 중학생은 성당을 가기 위해 8km를 걸어가야 했다. 그는 집 가까운 곳에 성당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향에 성당을 세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제의 길을 걸은 그는 지난달 현금 10억 원과 1억5000만 원 상당의 땅을 천주교 광주대교구에 기증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광주 동구 학운동성당 이성규(李成揆·60) 주임신부는 고향 마을에 성당을 짓는 데 써 달라며 지난해 12월 22일 현금 10억 원과 1억5000만 원 상당의 땅을 천주교 광주대교구에 기증했다.

“사제가 성당을 짓는 데 힘을 보탠 게 무슨 뉴스거리라고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요즘 아주 힘들었어요.” 사제관 옆 사무실에서 기자와 마주앉은 이 신부는 “신도들이 ‘큰일을 하셨다’고 말하지만 정말 내가 큰일을 한 것인지 아직도 어리벙벙하다”고 말했다. 그는 “숨기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민망할 따름”이라며 “하지만 가진 것을 주님 앞에 모두 내놓으니 마음만은 너무 홀가분하다”고 털어놨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또 찾아왔어요.”

3일 오후 광주 동구 학운동성당 사제관.

초인종을 누르자 현관문을 열던 이 신부는 “더 할 얘기가 없는데…”라며 난감한 표정이었다. 이 신부의 고향은 광주 광산구 수완동. 18년 전 광주로 편입되기 전까지 행정구역이 전남 광산군이었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그는 8남매 중 7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70여 마지기의 논밭을 가지고 있던 부농이었다. 유복한 집안 덕분에 그는 비아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유학을 갔다. 가톨릭교단이 운영하는 살레시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접하게 됐다. 그는 중학 2학년 때인 1961년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라파엘.

그는 영세를 받으면서 고향에 성당을 세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주일날 성당을 가려면 8km 넘게 걸었어요. 오전 7시 미사에 참석하려면 오전 4시에 집을 나서야 했죠. 그때 ‘집 가까운 곳에 성당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신부는 “‘고향마을 성당’은 어린 시절부터 가슴 속 깊이 간직해 온 꿈이었다”며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 덕에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됐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 신부는 “당시 동네에 가톨릭신자가 나 혼자였다”며 “친지들도 신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다 1975년 사제품을 받은 후에 한 명씩 영세를 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이나 군대를 갔다 온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신학대 재학 시절 사병으로 입대했고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전방 부대에서 군종(軍宗) 신부를 지냈다.

1980년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그에게도 아픔이었다. 그해 5월 21일 큰 누나의 아들(당시 26세)이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M-16 총탄에 맞고 숨졌다는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가족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듣고 그해 9월 강원 화천군 모 부대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고 폭로했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끌려와 합동수사본부에서 40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 일로 1998년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다.

1981년 대위로 예편한 뒤 사목활동에 전념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큰돈이 생겼다. 5년 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택지개발지구에 포함돼 거액의 보상금이 나왔다. 여기에 민주화운동 보상금, 정기예금 등을 합치니 10억 원이 됐다.

이 신부는 광주대교구가 수완동성당 부지 900여 평을 계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돈을 맡겼다.

현금과 함께 내놓은 전남 나주시 영산포 땅 250여 평(시가 1억5000만 원)은 그가 사회복지시설을 짓기 위해 월급 등을 모아 1999년 구입한 것.

그의 별명은 ‘깍쟁이 신부님’. 만나는 사람마다 전깃불과 수돗물을 절약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구멍 난 양말은 직접 꿰매 신을 정도다. 난방비를 줄이기 위해 겨울에 내복을 껴입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는 생활을 수년째 하고 있다. 지갑 속에는 신용카드 1장과 1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 전부다.

“아끼고 아껴서 남은 게 있다면 이웃을 돕는 데 써야 한다”고 말하는 이 신부. ‘나눔과 사랑’을 보여 준 그의 얼굴에서 성자(聖者)의 포근함이 느껴졌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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