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부모님을 모두 잃고 어려서부터 가장이 된 이순덕(李順德·73) 할머니.
그는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을 찾아 집을 나섰다가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두 여동생과 생이별했다.
"집을 나올 때 동생들이 내 손을 잡고 마당에서 데굴데굴 굴렀어요. 마지막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죠."
할머니는 북에 두고 온 두 여동생을 죽기 전에 꼭 만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통일 이후 조그만 집 한 채라도 마련해 줄 생각으로 말 그대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혈혈단신 남으로 온 그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이웃집에 물을 길어다 주거나 떡방아를 찧었다. 삯바느질을 하며 한 푼, 두 푼 벌었다.
1960년대 초 건국대 후문에 담배 가게를 연 이 씨는 여동생들을 위해 적금통장 2개를 만들었다. 매달 5000원 씩 저축했고 만기가 돼서 돈을 받으면 다른 통장에 저축했다.
지금 살고 있는 2층 건물을 1988년 구입한 뒤 3500만 원의 빚을 지고 매달 이자 50만 원을 갚을 때도 동생들을 위해 만든 통장은 건드리지 않았다.
일을 계속하고 돈을 모으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별로 쓰지 않았다. 겨울옷은 검정색 파카가 전부.
동생들을 보고 싶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고 여러 방법으로 생사를 확인하려 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렇게 모은 2억 원을 할머니는 17일 건국대에 전달했다. 지난해 1월에는 4억6000만 원 상당의 건물을 건국대에 기부했다.
할머니가 재산을 내놓은 이유는 5년째 앓고 있는 파킨슨병이 최근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손발이 떨리고 몸이 경직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 방에만 누워 있는 날이 많아요. 통일을 못보고 눈을 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힘들게 모은 돈인데 동생들에게 줄 수 없을 것 같아 좋은 일에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할머니는 북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 남으로 온 뒤 먹고 사는 일이 급해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학생들 덕분에 돈을 벌었으니 학생들에게 베풀고 가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많지 않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한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돈을 사용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었다. 가난 때문에 동생을 뒷바라지 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건국대 후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담배를 팔아 번 돈을 이 학교 학생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전 유일윤(劉一潤·1978년 작고) 전 건국대 이사장과의 개인적인 인연도 영향을 미쳤다.
건국대 법학과에 1965년 입학한 유 씨는 재학 시절 할머니의 담배 가게 단골이었다. 할머니는 "담뱃값이 없을 때 '유일윤 학생'은 종종 외상을 달고 가져간 뒤 며칠 뒤 찾아와 갚았다"고 말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둘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 적도 있다고 할머니는 기억했다.
건국대는 할머니가 2억 원을 기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교내 산학협동관 3층 소강당을 '이순덕 기념 강의실'로 이름 짓고 18일 명명식을 열었다.
또 통일이 돼 할머니의 여동생 2명과 연락이 닿을 경우 기부금 2억 원에 대한 법정이자를 매달 보내주기로 할머니와 약속했다.
이 할머니는 "어렵게 번 돈을 이렇게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라며 "통일이 돼 동생들과 연락이 닿으면 학교가 매달 이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손발의 떨림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혼자 외출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이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기부 사실이 알려진 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건국대 대학원생이 1주일에 2~3차례 찾아와 이 씨를 돌보고 있다.
할머니는 "아프고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동생들에 대한 내 마음의 흔적조차 없어지는 일"이라며 "45년 전 어린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학생들에게 베풀고 나니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편하다"고 말했다.
윤완준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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