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두 가지만 있다. ‘첫사랑’과 사랑. 첫사랑이 아닌 것은 그냥 사랑일 뿐이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말한 소설가 김연수를 흉내 내면, 첫사랑이 지나고 나면 두 번째 사랑이 오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 아닌 사랑이 올 뿐이다. 마치 자궁처럼 첫사랑은 그 이후의 사랑까지 애프터서비스를 해 주어야 할 의무와 원죄가 있다.
“첫사랑, 기억하고 있나요”라고 작가가 물어오는 소설 ‘티티새’는 이런 첫사랑의 원초적 에너지로 충만한 연애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여자 하루키’로 불리는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와 이미지 속에서 일본 소설다운 ‘밝은 냉정함’이나 ‘투명한 고독감’이 바나나 소설의 키워드인 성장과 자유, 희망과 맞물려 잘 형상화되고 있다. 생각이 아닌 느낌, 비극이 아닌 신비, 이산화탄소가 아닌 산소 중심의 담백한 연애담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걸맞게 이 소설 속의 연인들은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선남선녀이고, 그들에게서는 살내가 아니라 풋내가 난다. 혼란과 후회가 아닌 낭만과 동경을 품은 여름 바닷가를 중심으로 그들은 ‘따스하고 보슬보슬하고 깨끗한 모래’ 같은 첫사랑을 한다. 진흙탕 속에서의 더럽고 무거운 사랑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황순원의 ‘소나기’의 일본판 같은 이 소설 속 사랑을 더욱 매력 있게 만드는 인물이 바로 여주인공 쓰구미(티티새라는 뜻)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나 첫사랑의 아우라에 어울리게 무심(無心)해서 무해(無害)하고, 무지(無知)해서 무구(無垢)하다. 아이처럼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기에 오히려 온전하다.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 첫사랑은 마지막 사랑일 수 있기에 그녀는 더욱 당당하고 솔직하다. 너무 빛나서 슬프기도 하다.
물론 영원히 아이일 수 없듯이 첫사랑만 계속할 수는 없다. 첫사랑의 ‘end’는 사랑의 ‘and’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쓰구미의 어른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하며 끝난다. ‘열아홉 살 철부지 어린애’의 여름방학 동안의 하이틴 로맨스는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발 없는 사랑은 날개 없는 사랑만큼 힘들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첫사랑에 고착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남자들, 아직도 무공해 청정구역에서만 살 수 있다고 오인되는 여자를 연인으로 둔 순진한 남자들,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되려는 여자들과는 달리 여자의 첫사랑이 되려는 고집 센 남자들에게 이 소설은 필독서이다.
반면 발을 날개로 삼으려는 현실적인 여자들, 첫사랑 자체가 고유명사로 착각되는 보통명사임을 아는 영리한 여자들, 사랑이란 상대가 아니라 상황에 좌우된다고 믿는 슬픈 여자들에게 이 소설은 금서(禁書)이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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