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고은주]아이들에게 흙장난 시켜라

  • 입력 2006년 3월 20일 0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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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찌∼익 찌찍∼.”

직박구리가 골목길 좀 높은 나무에 앉아 기운차게 울어 댄다. 아침이면 자는 아이 깨워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시간을 다툰다. 다섯 살 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가는 길에 잠시 우리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게 바로 이 녀석들이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라서―그조차도 지금은 빌라들이 너무 많아졌다―걷다 보면 요란하게 울어 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언젠가 나무를 심는 것은 새를 보기 위함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잠시 딸아이와 새소리를 흉내 내 본다. 고개를 치켜들고 ‘쀼르르∼릉’. 어디에 있는지 찾을라치면 다시금 날아가 버린다.

봄이 오긴 왔다. 골목 이곳저곳에서 ‘두두두두…’ 하는 공사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공사 소리에 직박구리 울음소리도 묻히곤 한다.

동네에서 종종 “엄마, 무슨 소리야?”라며 묻는 아이들에게 쳐다보지도 않고 “참새야”라고 답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참새들이 이 말을 들으면 참 억울해할 일이다. 조그만 새가 어디 참새뿐일까?

우리는 참새 까치 비둘기 정도만 남아 있을 뿐 새들이 도시를 떠나 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참새와 비슷한 무리 중에 흰색 배에 회색 날개를 가진 박새도 있고, 연한 주홍빛을 띤 붉은머리오목눈이도 쉽게 볼 수 있다. 또 까치만큼 흔한 것이 회색빛 직박구리다.

새가 사람을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새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가깝게 산다는 것은 시끄럽게 울어 대는 새소리에 한번쯤 마음을 뺏겨 보기도 하고, 이름 모를 녀석을 한번쯤 자세히 쳐다봐 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 성미산숲속학교를 개강했다. 첫날 아이들과 산을 돌아보다 날이 풀려 질퍽해진 흙을 한 줌 줍는다. 흙 놀이를 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처음엔 주춤거린다. 하지만 한 명, 두 명 어느새 모두에게 흙 경단이 만들어졌다. 더 좋은 흙을 구하러 이곳저곳 탐색하기 시작한다.

경단을 조물조물 빚다 보면 그 사람만의 양념이 밴다. 누구 것은 차갑고, 누구 것은 따뜻하다. 작게 빚는 아이, 큼직하게 빚는 아이, 조심스러운 아이, 손아귀 힘을 다해 빚는 아이 등등. 눈을 감고 내 것과 다른 친구 것을 양손에 올려놓으면 단번에 그 차이를 알게 된다. 같은 흙이라도 사람의 손길에 따라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푹 빠져 놀다 산을 내려오는데 아이들이 말한다.

“선생님, 손이 더러워요. 씻을래요.”

“그래 씻어, 그렇지만 흙이 더러운 건 아니야.”

산에서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일상생활과 숲속학교 사이에 커다란 경계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산으로 들 때 아이들은 긴장의 허리띠를 풀어 놓는다. 긴장을 풀어 놓는 속도에도 놀라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올 때 긴장의 허리띠를 스스로 다시 매는 모습에 더 놀라곤 한다. 아스팔트와 빽빽한 전깃줄과 높은 건물은 아이들에게조차도 본능적인 긴장감을 주는 것 같다. 이럴 때면 성미산 흙도 좋지만 집 앞 골목길 아스팔트를 한 평이라도 걷어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봄 아이들에게 멍하니 새를 쳐다볼 시간과 옷과 손을 ‘더럽힐’ 용기를 선물하고 싶다.

고은주 성미산숲속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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