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명쾌하지가 않다. 지난해 가을 한국 라르슈공동체 ‘라르슈친구들’ 이사회 대표로 취임한 송주한(宋柱漢·43) 씨는 “라르슈는 아직 한국에서 걸음마도 안 뗀 상태”라고 설명했다.
송 대표는 라르슈가 회원 후원인 이사 모두의 것이고 자신은 그중 한명일 뿐이라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날을 사흘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송 씨는 라르슈에 대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오후 4시 시작된 인터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송 씨는 ‘출판쟁이’ 출신이다. 교육전문출판으로 성공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슬럼프가 왔다. 어느 순간 사장인 자신의 판단이 출판 상황에 ‘들어맞지’ 않게 됐다. 주간에게 출판사를 맡기고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일본연수 준비를 끝내고 출국을 앞둔 2001년 2월 셋째아들 우근이(당시 3세)가 발달장애(자폐성) 판정을 받았다.
해외연수는 물론 가정의 안락함마저 포기해야 했다. 자신은 우근이를 온전히 떠맡게 된 아내에게조차 의지가 되지 못했다.
“산다는 것이 지옥이었습니다. 밤마다 아내는 저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진짜 휴식이 필요했다. 2003년 초 휴직하고 우근이를 돌보면서 비로소 여유를 찾았다.
우근이는 눈을 맞추지 못하고 말도 못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특정 물건에 집착했다. 바퀴를 좋아해 달리는 차에 달려들려는 우근이의 손을 아내는 꼭 잡아야 했다.
행동을 봉쇄당한 아이가 나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송 씨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되 손을 놓아주었다. 자신을 분출할 수 있게 된 아이의 과잉행동이 없어졌다.
그해 여름 한 달간의 캐나다 가족여행을 앞두고 우근이는 당연히 배제됐다. 그러나 아내가 우근이를 두고는 못가겠다고 버텼다. 결국 우근이도 합류키로 했다. 우근이를 위한 별도의 여행준비가 시작됐다. 아이 팬티에까지 온갖 연락처를 영문으로 새겼다. 그러나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낯선 곳에 간다고 상황을 파악한 아이는 손을 꼭 잡고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리저리 뛰는 두 형을 챙길 정도였다.
“라르슈공동체는 그런 곳입니다. 저도 장애인을 도와줘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지 그 아이의 잠재성을 발견할 수 없었지요. 장애인의 무한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라르슈입니다.”
송 씨가 라르슈를 만난 것은 이듬해 초 장애인부모 초청 캐나다 연수에서였다. 출국 전 장애인가족 20여 명으로 구성된 라르슈 준비모임 ‘라르슈친구들’에 참석했다.
“라르슈는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하기도, 보여 주기도 어렵습니다.”
캐나다의 라르슈공동체 ‘데이브레이크’는 토론토에 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헨리 나우웬 교수가 감동을 받아 조력자로서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라르슈는 1963년 캐나다의 천주교 평신도였던 장 바니에가 프랑스의 정신지체시설을 방문한 뒤 다음해 두 명의 장애인을 데려다 함께 살면서 시작됐으나 종교적 색채를 배제했다.
국내에서는 ‘라르슈친구들’에 참여하고 있는 수녀가 지난해 장애인 두 명을 데려다 공동체를 시작하기도 했다. 종교인은 조력자로 일할 수 있으나 정식 직원은 될 수 없다.
라르슈는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정신지체장애인이 대상이다. 일단 라르슈 멤버가 되면 평생 공동체에서 살 수 있다. 멤버는 일을 하거나 연금으로 생활비를 내며 운영비는 후원금으로 충당된다. 새로운 멤버나 조력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 멤버의 투표에 따른다.
비장애인은 조력자로서 원하는 만큼 살면서 공동체에서 주는 실비(월 60만∼70만 원)를 받는다. 외국에서는 방학을 이용해 2개월 정도 머무는 고등학생이 많고 일반인은 1, 2년이 보통이다. 라르슈는 세계적으로 30여 개국에 120개가 있다.
“몇 년 전 특수교육과 학생이 해외 라르슈에서 2년간 조력자로 일한 뒤 국내에 돌아와 장애인복지시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복지시설을 그만둔 것은 물론 전공까지 바꾸더군요.”
송 씨의 노력은 아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장애인이 라르슈 멤버가 되면 그 가족은 직원이 될 수 없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근이가 라르슈 멤버가 될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근이 덕분에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어요. 그동안 성공하기 위해 살았지만 이제 의미 있게 살 수 있어 행복합니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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