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업인들이 수사를 받은 때는 거의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경제위기나 기업의 경영위기가 닥치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져 경제부처 공무원이나 오너 전문경영인을 막론하고 기업인들이 수사대상이 됐다. 죄목은 공무원들에게는 직무유기, 경영인들에게는 횡령 배임혐의가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경제위기의 극복'을 대신해 '양극화해소'가 과제로 내걸려 분위기는 다르지만 혐의 내용을 보면 배임 횡령 탈세 등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중에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가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배임(背任)혐의다. 공무원의 직무유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직무유기와 배임에 대한 판결은 다르다.
1990년 환란 재판 때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공무원들은 직무유기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피고인들이 외환사정의 심각성을 의식적으로 축소 또는 은폐 보고했다는 증거나 고의성은 찾을 수 없다.... 피고인들에게 조속히 IMF행을 결정하지 못한 점을 탓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직무범위 내에서 외환위기 대책을 마련한 만큼 직무유기와 직권남용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
감사원이 수사 의뢰하고 검찰이 강경식 전부총리와 김인호 전청와대 경제수석을 '환란의 주범'으로 징역형을 구형했다.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직무유기가 '죄목'이었다. 그러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정책판단에 대해서까지 '나중에 결국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이유로 사법적인 처벌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 이 재판에서 확인됐다.
정책판단은 무죄, 경영판단은 유죄?
그후 환란의 책임은 '방만한' 경영을 한 기업인들에게 돌려졌다. 많은 기업인들이 경영에 책임을 지고 구속됐고 그들이 경영하던 기업들은 공매절차를 거쳐 새 주인에게로 갔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기업의 과다한 부채가 환란의 원인이었다고 보고 부채비율을 낮추라는 '강압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다. 기업들은 사재를 동원해 빚을 갚거나 무리하게 증자를 통해서라도 수치상의 부채비율을 낮춰야 했다. 요즘 수사를 받고 있는 현대자동차와 참여연대에 의해 고발된 신세계의 경우 이때 정부의 방침에 따라 증자를 한 결과가 문제가 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정몽구회장은 증자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 계열사들에게 증자하도록 했다가 약 3천여억원의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배임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반면, 신세계는 대주주가 계열사 증자에 참여해 이익을 독식했다는 이유로 고발된 것이다.
정부 지시에 따랐어도 배임혐의
기업인들에겐 난감한 일이다. 정부의 지시를 따르자니 나중에 불법행위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거부했다간 당장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때문에 경영인들은 배임혐의에 대한 판결에 민감하다. 경영인의 배임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할 경우에는 주주의 권익이 침해될 것이고, 반대로 엄격할 때에는 경영인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킬수 있다.
과거 1960년대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불렸던 한비사건 때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던 고 이병철 전 삼성 창업주는 "정치한다는 사람 믿지 말라"고 했다. 정부가 사전에 내락한대로 투자했지만 나중에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억울함을 한마디로 말한 듯하다. 요즘 기업인들이 새겨두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정부 당국자의 말을 곧이 믿을 수 없을진대 하물며 정치권 로비스트의 말을 어찌 믿고 비자금을 만들고 주고 받을 수 있을까.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