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감독은 최 씨를 ‘한국 최초의 스타 여배우’라고 평가했다. 최 씨 뒤에 김지미, 그리고 다음에 윤정희 남정임 문희 트리오의 시대였다. 최 씨는 남북한에서 10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세계 영화제 수상 기록은 최 씨가 북한에 있을 때 ‘소금’(1985년)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다.
남편 신 감독과 사별한 최 씨를 3시간가량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1954년 결혼해 52년 동안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산 부부 사이에는 혈육이 없다. 최 씨는 신 감독과 의논해 두 아이를 입양했다. 두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부부가 북한에 납치됐다. 최 씨는 “두 아이가 충격을 이겨 내고 잘 커 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신 감독은 간 이식 수술을 2년 전에 받았다. 처음에는 딸(명희)이 간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크기가 맞지 않았다. 그러자 사위가 나섰다. 사위는 장인 장모가 아내를 잘 길러 준 데 대해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
신 감독이 아들(정균·영화감독)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말한 것이 유언이 됐다. 장례를 치른 뒤 명희 씨와 정균 씨 부부가 교대로 어머니를 수발하고 있다. 기른 자식이 낳은 자식보다 낫다.
신 감독은 최 씨 모르게 바람을 피워 영화배우 오수미(교통사고로 사망)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최 씨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해 걱정하면 신 감독은 “애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 둘이 좋은 영화 많이 만들면 되지”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혼외(婚外)의 두 자녀를 둔 것을 알고 나서 최 씨는 배신감을 못 견뎌 신 감독과 이혼했다.
천생연분이었던지 이들은 북한에 납치돼 재결합했다. 최 씨는 북한에서 신 씨를 용서했다. 상부(喪夫)한 미망인은 “평생 내가 사랑한 남자는 신 감독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부는 북한을 탈출한 뒤 정균 씨와 함께 오 씨의 두 자녀를 미국으로 불러 공부시켰다. 명희 씨는 결혼해 가지 못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희수(喜壽·77세)를 맞은 최 씨에게 “신 감독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서운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정균이가 맏상제 노릇을 잘했어요. 내가 출산은 못했지만 우리 애들이 효도를 해 서운함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최 씨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동석한 지인의 제의로 위스키를 한잔하게 됐다. 최 씨도 술을 조금 마셨다.
그에게 “한국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서 무척 많은 걸 성취했는데 혹시 이루지 못해 서운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내 인생에서 출산 못한 게 가장 가슴에 남아 있지요”라고 말했다.
답변을 듣고 나서 공연한 것을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 눈물을 흘렸는데 또 울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과년(過年)한 딸을 둔 부모들에게서 가끔 중매 부탁을 받는다. 요즘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서른이 넘어 시집을 안 가도 태연하고 고학력 전문직 중에는 30대 중반을 넘겨서도 독신으로 지내는 여성이 많다. 결혼해도 쉽게 갈라지고, 아이 갖기를 늦추다가 기껏 하나만 낳는다.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은 출산과 육아를 해 보지 않은 여성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행복을 넘어 국가에 이바지하는 일이 됐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황호택 논설위원이 신동아에서 만난 '생각의 리더 10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졌습니다.
가수 조용필, 탤런트 최진실, 대법원장 이용훈, 연극인 윤석화, 법무부 장관 천정배, 만화가 허영만, 한승헌 변호사, 작가 김주영, 신용하 백범학술원 원장,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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