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은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에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정상회담을 하느냐 마느냐는 결국 북핵 문제, 남북관계 진전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느냐는 판단이 앞서야 한다.”(2004년 7월), “북핵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2004년 12월), “한국이 정상회담 그 자체를 하나의 성과로 생각하고 너무 그것에 매달리게 될 때 오히려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등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2005년 11월)
노 대통령은 틈틈이 “상대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남북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를 풀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전략적으로 유효하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만은 아니다”(2005년 7월)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노 대통령이 핵문제는 접어두고 무조건 만나자고 돌아선 것이다. 중대한 대북(對北) 정책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왜 갑자기 정책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남북 정상회담으로 북핵 문제를 풀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유효한 때가 왔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런 것인지 국민은 알지 못한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뭔가 대북 중대 제안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는데 그런 것은 없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변화가 있기 어렵다”고 했다. “(대통령 발언은) 언제 어디서든 남북정상 간 만남을 통해 6자회담의 답보상태를 타개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6월 방북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듯 모호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노 대통령은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려 한다. 제도적 물질적 지원을 조건 없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민 보기에 자존심 상하게 원칙 없이 양보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했지만 ‘조건 없는 제도적 지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북측은 “낡은 대결시대의 그릇된 관행과 관습, 제도적 장벽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남한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한미연합군사훈련도 중지하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미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했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은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 내용이 북한에서 보기에 불안한가 보다”며 불신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국보법을 폐지하고 한미연합군사훈련도 중지할 생각이 있다는 것인가. 다음 주 월요일 귀국하는 노 대통령은 이 점부터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다수 국민이 북측이 요구하는 대로 국보법을 폐지하고, 대한민국의 현실적 생존조건인 한미동맹 대신 허황된 ‘민족끼리’를 택하는 데 동의하는지 물어야 한다.
‘조건 없는 물질적 지원’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가 남은 임기 동안 국정운영의 최우선순위라고 했다. 빈곤층의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재정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세금을 닦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무슨 재원이 있어 북에 큰 양보를 하고 조건 없이 물질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또한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미국과 주변국들과의 관계 때문에 정부가 선뜻 할 수 없는 일을 DJ가 길을 잘 열어 주면 저도 슬그머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이제 와서 DJ의 방북(訪北)이 개인 자격인지 정부 특사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DJ가 진정 전직 대통령으로서 남북문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평양에 가는 것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남북 정권 간에 더는 ‘슬그머니’ 뒷거래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북측에 딱 부러지게 알려 주는 것이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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