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이 없었다면 쑥대밭이 되어 버린 한반도는 이미 조선조 건국 100년 만에 왜의 속방(屬邦)이 됐을지 모른다. 간송이 없었다면 식민지 조선은 역사적 황무지가 되고 겨레의 귀중한 문화유산은 대부분 대한해협 저쪽으로 넘어갔을지 모른다.
간송이 있었기에 우리에겐 ‘훈민정음’ 원본도 있고, 혜원(蕙園)의 민속화첩도 있다. 간송이 있었기에 수도, 값도 헤아릴 수 없는 겸재(謙齋) 단원(檀園)의 명화며, 추사(秋史)의 명필이며, 국보로 지정된 청자 백자의 명품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일본의 수집상에게 넘어갈 뻔했던, 심지어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간송은 십만석꾼의 전 재산과 전 생애를 바쳐 사 모아서 이 땅 이 겨레 곁에 고스란히 간수해 놓았다. 그로 해서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문화유산들을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게 수장하고 있는 곳이 그의 간송미술관이다. 나라도 못하는 일을 나라 잃은 식민지 치하에서 한 사람의 간송이 해낸 것이다.
올해는 1906년에 태어난 간송의 100돌 되는 해이다. 그를 기념하여 간송미술관에서는 수천 점의 소장품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품 100점을 골라 21일부터 전시회를 연다. 올해는 또 간송미술관이 문을 연 지 40돌, 그 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보華閣) 건물을 지은 지 70돌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36년 간송의 나이 겨우 서른 살 때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부터 10년 전(1996년), 정부가 간송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그때도 미술관의 일품(逸品)들로 특별 추모전시회를 마련한 일이 있었다.
간송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나는 놀라움과 고마움의 마음과 함께 다른 한편으론 답답함과 아쉬움의 감정을 억누를 길 없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은 우리에겐 4명의 교황과 유럽의 뭇 왕비를 배출한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家)가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과도 바꿀 수가 없다. 가령 ‘훈민정음(해례본)’의 초판 원본-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뜻으로 만들었는지가 분명한 인류 문화사상 유일의 문자, 한글 창제의 의도와 해설을 밝힌 ‘훈민정음’의 초판본은 지구상에 한 권밖에 없는 세계 문화유산이다. 이 훈민정음 하나만을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도 간송미술관 건물 공간 전체를 다 써도 넉넉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책을 수장하고 있는 미국 워싱턴의 국회도서관 본관의 메인 로비에는 그 넓은 공간에 오직 두 권의 책을 온갖 경보장치와 함께 유리장 속에 전시해 놓고 있다. 한쪽에는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한 성서, 다른 한쪽에는 15세기 독일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가 그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초판본이 세계의 유일본인 것과는 달리 구텐베르크의 성서는 47권이나 세계의 여러 곳에 보존돼 있다. 근래에는 일본 나라(奈良)의 호류사(法隆寺)가 구다라간농(百濟觀音)을 따로 모시기 위해 성금을 모아 별채의 사당을 건립한 사례를 보았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국보 보물 등 문화재들이 제격에 맞는 공간을 차지하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고 넉넉하게 전 세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미술관 우피치(Galleria degli Uffici)에 못지않은 큰 건물이 마련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가슴이 답답하다. 누가 그 건물을 짓는단 말인가. 마땅히 국가나 재벌이 나서서 지어 간송미술관에 기부해야 된다. 오페라 작품도, 연주할 오케스트라도, 가수 앙상블도 없이 곳곳에 오페라 극장부터 지어 놓고 놀리고 있는 판에 민족문화의 일품들을 수장 전시할 미술관 하나를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마련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나는 권력이나 재력을 추구하지 않은 내 인생이 후회되기도 한다.
최정호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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