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16년만에 하버드대 박사학위 따는 서진규 씨

  • 입력 2006년 5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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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지 16년 만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서진규 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 선 서 씨는 “과거에는 오기와 분노 때문에 힘든 생활을 버텨 왔지만 이제는 ‘꿈’ 때문에 힘든 도전을 계속 한다”고 말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지 16년 만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서진규 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 선 서 씨는 “과거에는 오기와 분노 때문에 힘든 생활을 버텨 왔지만 이제는 ‘꿈’ 때문에 힘든 도전을 계속 한다”고 말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서 ‘가시나’로 천대받았던 그였다. 고교 졸업 후 가발공장 등을 전전하다 23세 때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 들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식모 이민’을 떠났던 그였다. 그가 드디어 하버드대 박사가 된다. 6월 8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손에 쥐게 되는 서진규(58) 씨. 1999년 자전 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로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그를 최근 보스턴 하버드대 교정에서 만났다.》

“정말 꿈만 같아요. 제가 속한 하버드대 문리대에서는 석사 과정 입학 10년 안에 박사학위를 따도록 돼 있어요. 제가 1990년에 석사 과정에 입학했으니깐 2000년부터는 매년 대학본부에서 ‘올해까지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 왔어요. 그때마다 학과에서 제 사정을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서 씨는 “계산을 해보니 제가 학생증을 갖고 있던 기간이 통틀어 31년이다”며 “어렸을 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한이 맺혔는데 그 때문인지 공부를 실컷 하는 게 제 운명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의 이력은 평범하지 않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가정부로 일하기 위한 미국행, 뉴욕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미군 입대, 14년간 5개 대학을 옮겨 다닌 끝에 학사학위 취득, 마흔둘의 나이에 소령 예편 후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버드대 국제외교사 및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받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에서 미군정에 미친 일본의 영향’.

“교수님들은 나이가 든 학생이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요. 몇 차례나 논문이 퇴짜 맞을 때는 내가 과연 박사학위를 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들었어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C형 간염이 악화돼 어려움을 겪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갔는데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나왔어요. 공부하느라 무리하면서 더 악화됐나 봐요. 이러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는 1년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치료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와 병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치료 시기를 미뤘어요. 이제 박사학위를 땄으니깐 한국에 가서 1년 정도 쉬면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에요.”

50대의 나이에 딸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한 하버드대 생활은 어땠을까(서 씨의 딸인 성아 씨도 하버드대 출신이다. 성아 씨는 학생군사교육단에 지원해 현재 미 육군 대위로 하와이에서 근무 중이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무서울 만큼 똑똑해요. 저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상대가 안돼요.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도 많이 느꼈어요. 그러나 저는 경험이 많잖아요. 그래서 강의실에서 토론할 때 주로 경험을 무기로 활용했는데, 항상 아슬아슬했지요. 그래도 함께 맥주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그는 하버드대에서는 ‘독종’으로 통한다. 논문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이 500권을 넘는다. 뒤늦게 시작한 일본어 실력도 이제 일본인을 대상으로 큰 불편 없이 강연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그에게 그동안의 수많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분노와 오기였어요. ‘왜 나는 무시 받아야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돼’라는 오기 때문에 살아왔지요. 그러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한 뒤에는 그 같은 오기와 분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꿈’ 때문에 살아가요. 제가 이 나이에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요즘에는 제 책을 읽고 희망을 갖게 돼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됐다는 독자들의 편지도 큰 힘이 됐어요.”

그는 앞으로 책을 추가로 쓴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힘든 시절을 살아온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문 소설도 어느 정도 초고를 잡아 놓은 상태다. 또 20년에 가까운 군대 생활과 16년 동안의 하버드대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책으로 준비 중이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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