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메가폰 외교’의 한계

  • 입력 2006년 5월 25일 03시 03분


지구촌에는 요즈음 메가폰 외교가 유행이다. 당사자들이 만나 현안에 대해 차분하고 이성적인 협의나 협상을 하는 대신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선언하고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압력을 가해 보자는 것이 메가폰 외교의 핵심이다.

예컨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가스 보급을 잠시나마 중단하고 에너지 전쟁을 시도한 이래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에서는 공개적으로 ‘러시아 때리기’에 들어갔다. 미국의 딕 체니 부통령은 최근 옛 동유럽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회동하는 자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위협과 협박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또한 이란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과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위협적인 언사를 쏟아 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뒤뜰이라고 여겨지던 남미의 베네수엘라에서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석유를 무기로 삼아 공개 도전장을 내고 있다.

그러나 외교 면에서 볼 때 이러한 메가폰 외교가 실효를 거두고 그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많은 경우 그러한 공개적 비난과 압력은 타협과 협상을 더 어렵게 한다. 압력을 주는 상대국에는 강경한 입장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다. 우방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충분한 사전 협의 없는 일방적 정책 선언은 신뢰심과 협력정신을 저하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각국의 지도자들은 왜 이렇게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사실상 역생산적인 메가폰 외교를 수행하는가? 그 이유가 일률적일 수는 없으나 대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감정이나 이념에 얽매여 그러한 공개 외교의 비실용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일 것이다. 아마도 체니 미 부통령의 러시아에 대한 언사는 그 효과를 계산한 것이라기보다 러시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결과를 알면서도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역효과 나는 외교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본 외교에 막대한 손실을 주면서도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국내 정치적 계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그것이 외교적 미숙과 잘못된 판단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한된 경험과 지적 능력으로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 외교적으로 역효과 나는 결정이나 행동도 그것이 국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오판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문제는 세계에 ‘조용한 외교’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증가되고 메가폰적 외교의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나라에서 정치가 대중민주주의화됨에 따라 선동적 정치인들이 집권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이들이 효과적인 외교보다는 국내적 필요에 의해 좌우되는 외교 행태를 선호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가깝게 우리는 개성공단을 포함한 남북한 문제가 한미 간 메가폰 외교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북한 인권 담당 특사가 개성공단의 근로조건 등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북한의 인권을 위해서나 한미 관계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동시에 그에 대해 우리 정부가 극단적인 언사로 반박하는 것도 개성공단을 위해서나 미국과의 관계를 위해서 좋은 일이 못 된다.

외교에는 인간관계와 비슷한 점이 많다. 말은 절제 있게 하고 행동은 떳떳하게 하는 것이 요청된다. 메가폰 외교는 효과보다는 부담을 더 많이 내포한다. 인간관계가 잘못될 때 그 손해는 개인이 떠안게 되지만 외교의 경우 그 부담은 국가와 국제사회에 돌아오게 된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 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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