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에 마음이 확 끌렸다. 지네딘 지단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건 알겠는데 ‘21세기의 초상’이라는 부제는 왜 붙은 것일까. 축구선수를 다룬 영화가 얼마나 작품성이 뛰어나기에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됐을까.
영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단의 축구 인생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이겠거니 했던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제작진이 선택한 영화의 무대는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지난해 4월 23일 열린 비야레알과의 경기다.
카메라는 90분 내내 볼을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지단의 모습만 쫓았다. 그는 볼이 없을 때는 발을 질질 끌며 걷기도 했고 목이 타는 듯 침도 자주 뱉었다. 땀이 턱 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것도 또렷하게 보였고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도 비쳤다. 이를 위해 카메라 17대가 동원됐다고 한다.
화면에 온통 지단만 등장하는 바람에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칸의 평론가들은 “스포츠 영화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고 호평했다지만 관객들로선 지루한 영화였다.
제작진의 의도가 궁금해 인터뷰 기사를 검색해 봤다. 공동 감독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더글러스 고든과 프랑스인 필리프 파레노 감독은 “21세기를 대표하는 한 남자의 초상을 그리고 싶었고 그래서 선택한 게 지단이었다”고 밝혔다. 고든 감독은 “지단은 축구팬들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축구를 넘어선 그 무엇인가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두 감독은 “기획 때부터 지단을 염두에 뒀으며 그가 수락하지 않으면 포기할 생각이었다”고도 했다.
감독들의 설명에도 영화의 의도가 명확히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단의 캐릭터와 축구 인생, 그리고 그의 생활을 되돌아봤을 때 지단을 선택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단에게는 남다른 카리스마가 있다. 말도 없고 표정의 변화도 별로 없다. 묵묵히 경기에 열중하고 자신의 실력 연마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항상 겸손하다. 말썽 많은 호나우두가 지단의 카리스마에 이끌려 그를 믿고 따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얘기.
그라운드 밖에서도 지단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 실천해 왔다. 알제리 이민자 집안 출신인 그는 평소 과묵하지만 프랑스 극우파들의 ‘반(反)이민’ 주장에는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친선대사로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섰고 장애 아동을 돕는 모임에 성심껏 참여했다. 그는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종종 얘기해 왔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에 매년 1, 2위를 오르내린 건 비단 축구를 잘해서만이 아니다.
4월 중순 지단이 독일 월드컵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접겠다고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이 “역시 지단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단은 “지금까지 해 온 것만큼 잘할 수 없을 것 같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계약 기간은 내년까지다. 체력 부담을 숨기고 1년만 더 뛰면 100억 원이 넘는 연봉이 보장되는데도 굳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려는 지단을 두고 프랑스인들은 “지단을 본받아야 할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TV의 한 정치 비평 코너에서는 노골적으로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을 가리키며 지단을 본받으라고 꼬집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한국과 맞붙는다. 지단은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비록 상대팀 선수지만 그를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멋진 플레이를 기대해 본다.
금동근 파리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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