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면 마치 저승에 가는 것 같다.” 소설가 김훈이 사석에서 한 얘기다.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이 말은 알피니스트의 징처럼 가슴의 바위에 박혔다. 내 고향의 묘는 모두 산에 있었고, 죽은 사람들은 상여를 타고 항상 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네팔의 히말라야에서 나는 진짜 저승으로 가는 황천길을 보았다. 좀솜에서 카그베니를 거쳐 묵티나트로 가는 길, 울창하던 숲은 사라지고 가시 달린 식물들이 힘겨운 삶을 지탱하는 사막이 펼쳐진다. 히말라야의 먼지를 데리고 내려오는 검은 강물은 좀처럼 속을 비치지 않고, 낮은 음으로 무겁게 파고드는 노래는 끊임없이 자갈을 생산하고, 자갈은 보이지 않는 속도로 모래가 되어간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칼리간다키(검은 강이란 뜻)를 따라 걸으면 황천길이 이곳이구나 싶어집니다.”
“더 얘기하지 마. 당장 떠나고 싶어지니까.”
우리는 왜 산에 오르고 싶어하는가? 나의 사전에는 본래 ‘등산’이란 없었다. 내 어릴 적 놀이터가 산이었으며, 부모의 일터도 산이었으므로, 늘 산과 함께했기에 등산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등산이 취미가 된 것은 서울에 정착한 후였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산과의 만남을 소홀히 하면 내 몸과 마음도 어김없이 탈이 나곤 했다. 저승으로 가는 길에서 이를테면 교통사고가 난 셈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히말라야를 만나면서 나는 저승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만났다. 포카라에서 출발하여 고레파니, 타토파니, 마르파, 좀솜을 거쳐 묵티나트를 향하는 보름 동안의 트레킹은 다녀온 뒤에도 한시도 쉬지 않는 내 영혼의 여행길이다.
타고난 역마살로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을 그려온 작가 자크 란츠만의 ‘히말라야의 아들’은 저승으로 가는 순조로운 여행길인 히말라야의 검은 강물을 내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검은 강물이란 곧 인간의 마음일 터, 평범한 수학 교사인 알렉상드르는 사고로 죽은 형 장의 뼛가루를 안고 형의 아들이 살고 있는 셰르파의 나라로 떠난다. 에베레스트의 남체에서 형의 여인을 만난 알렉상드르는 자신이 어느새 형의 영혼과 함께 살고 있음을 느낀다. 알렉상드르의 히말라야 여행은 결국 형의 여행이었던 것이며, 그러기에 저승으로 가기 위한 여행이며, 아니 저승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형은 여행 중 남긴 메모에서 ‘정상에서 산의 처녀를 빼앗는 것, 그건 모든 성교 중에서 가장 자극적인 성교가 아닌가?’라고 썼다. 몸과 마음의 자유를 꿈꾸었던 그의 철학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러나 죽은 후에 동생의 몸을 빌려 히말라야의 육체를 상징하는 여인을 품었을 때, 그의 행위는 이제 산의 처녀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산의 처녀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산과의 ‘성교’임에 분명하지만, 또한 저승으로 가는 여정이기에 그것은 슬프고 또 한없이 아름답다. 누가 그 아름다운 길을 막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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