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영국에서 당한 교통사고 피해 보상금으로 받은 10억 원을 남편 백경학(43) 씨가 상임이사로 있는 푸르메재단에 기부한 황혜경(41) 씨는 자신의 돈이 숲과 호수가 있는 장애인 재활전문병원을 짓는 데 쓰이기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푸르메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황 씨는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밝아 보였다.
사고 충격으로 말을 조금 더듬는 장애가 남아 있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했고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황 씨는 언론사에 다니던 백 씨와 함께 1996년 독일로 해외연수를 간 뒤 1998년 6월 영국 스코틀랜드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가 글래스고 인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통약을 지나치게 많이 먹은 채 운전하던 중 일순간 정신을 잃고 핸들을 놓친 운전자의 차량에 부딪힌 것.
그는 8년간의 소송 끝에 지난달 가해자 측 보험사로부터 107만5000파운드(약 20억 원)를 받았고 소송비용을 제외한 보상금의 절반인 50만 파운드(약 9억 원)를 재단에 기부했다. 전동 휠체어와 의족 등의 구입비용으로 우선 지급받은 보상금 1억 원도 지난해 재단에 기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거액을 재단에 선뜻 기부하기까지 마음의 갈등은 없었을까.
“단 한번도 내 돈이라고 여긴 적이 없어요. 어차피 가해 차량이 보험에 안 들었으면 못 받는 돈이잖아요. 저 같은 장애인들을 위해 쓰라고 하느님이 주신 돈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1999년 말 귀국해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국내 장애인 재활시설의 열악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매년 30만 명 정도가 뇌중풍(뇌졸중)과 교통사고 등으로 후천적 장애를 겪습니다. 하지만 150병동 이상의 재활병원은 전국에 불과 4개뿐이고 크고 작은 재활병원을 다 합쳐봐야 40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어요.”
재활병원에 입원하려면 2, 3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건 기본. 힘들게 입원한다 해도 2개월 이상 머물기 어렵다.
“온통 콘크리트 벽뿐인 병원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도 없고 하루에 불과 1시간 정도의 물리치료와 작업치료가 재활치료의 전부”라는 게 황 씨의 지적이다.
“장애인은 생사를 다투는 위급환자가 아니에요. 심리적 안정이 중요합니다. 환자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장기적인 재활 프로그램을 짜고 환경도 자연 친화적으로 바꿔야 해요.”
황 씨가 다른 장애인들의 처지를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갖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황 씨는 사고 후 두 달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뒤 왼쪽 다리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가해자를 증오했고 외국으로 자신을 데려 온 남편도 원망스러웠다. 걷는 연습이 너무 힘들어 ‘차라리 사지가 마비됐으면 이런 운동을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까지 했다.
가해자 측 보험사와 벌인 보상금 줄다리기도 황 씨를 힘들게 했다. 보험사는 매년 황 씨의 정신·육체 상태 진단서를 요구했다. “왜 다시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지, 왜 취업하지 않는지”를 따져 물었다.
황 씨는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기 어려운 국내 상황과 중증 장애인의 취업이 어려운 현실을 설명했지만 보험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버텼다.
재활과 소송이라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며 황 씨는 차차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과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을 바꾸자 밉기만 했던 가해자도 용서할 수 있었다. 지난달 보상금이 지급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남편 백 씨와 함께 근처 공원을 찾았다. 백 씨는 “8년간의 큰 태풍 때문에 우리 가족의 뿌리가 뽑힐 정도로 힘들었지만 이제 모두 지난 과거”라고 말했다.
시련도 많았지만 도와 준 사람도 많았다. 사고 직후 뉴캐슬에서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이 글래스고까지 달려와 간병을 도왔다. 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광장의 안용석, 장우영 변호사는 “더 좋은 일에 쓰라”며 수임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황 씨는 “‘은혜는 돌에 새기고 미움은 물에 새기라’는 속담의 의미를 깨달은 8년이었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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