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네덜란드인

  • 입력 2006년 6월 26일 03시 03분


축구의 딕 아드보카트 감독과 거스 히딩크 감독은 모두 네덜란드인이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16강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아무도 감독을 탓하지는 않는다. 만일 요하네스 본프레러나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지휘했더라면 어땠을까. 히딩크가 키워 놓은 한국축구를 ‘아드보’가 업그레이드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축구에 관한 한 네덜란드인과 연(緣)이랄까 ‘궁합’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네덜란드인은 실용적이고 부지런하다. 식당에서의 ‘더치페이’(각자 내기)는 바로 ‘네덜란드 식 계산’을 뜻한다. 이들의 근면함은 “세계는 신이 만들고,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말을 낳을 정도다. 외침과 간섭에 시달린 역사 탓인지, 억압에 저항하는 기질도 유명하다. 인도주의적 배려심도 있어서 나치 시절에는 유대인을 보호하고, 그 후에도 정치적 망명자를 환영해 마지않았다. 이런 점들은 우리 한국과 통하는 것만 같다.

▷네덜란드는 개방의 나라다. 일찍부터 해외시장에 눈을 떠서 일본 나가사키까지 오가며 무역을 했다. 일본을 다니다 1626년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내린 선원이 벨테브레이다. 그는 훈련도감에 배치돼 총포 일을 보다가 호란(胡亂) 전투에도 동원된다. 귀화해서 박연(朴淵)이 된 그는 1653년 ‘동포’ 선원인 하멜 일행 36명이 표착하자 통역 안내를 맡았다. 그 하멜 일행은 무려 13년간 감금 폭행 매질 유형(流刑) 구걸 같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탈출해 ‘하멜표류기’를 써내 ‘폐쇄적인 조선’을 세계에 고발했다.

▷이미 중국에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하고, 일본은 유럽과 교역을 하던 시절이다. 조선도 하멜 같은 ‘화란인’을 통해 세계에 눈을 뜨고 배울 수는 없었던 것일까. 네덜란드인과의 인연을 잘 살렸더라면 일찍이 ‘4강 신화’ 같은 대길(大吉)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드보’와의 작별에 즈음해, 다시 그 나라를 생각한다. 노조 파업이 드물고, 종교 분쟁이 없으며,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네덜란드를. 아듀, 아드보!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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